[특파원 칼럼]

100여년 전 전문가 '중시'와 '경시'가 갈랐던 한·일 역사

입력 2017-08-30 18:49 수정 2017-08-31 03:42

지면 지면정보

2017-08-31A33면

일본, 전문가 중심 의사결정 '전통' 고수
한국, 비전문가 의존한 정책 실험 늘어

김동욱 도쿄특파원 kimdw@hankyung.com
1893년 10월 마쓰가타 마사요시(松方正義) 일본 총리는 금본위제 도입을 검토하기 위한 전문가 기구로 ‘화폐제도 조사회’를 설치했다. 조사회에는 관계·재계·학계·정계 관계자 20명이 참여했다. 영국 유학파로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자 앨프레드 마셜을 사사했던 소에다 주이치, 통계학자 호소가와에 유지로, 재무성 관리 및 미쓰이은행 간부를 지낸 하야가와 센키치로 등이 조사회 멤버였다. 당초 은본위제를 유지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요코하마정금은행장이었던 소노다 고키치가 “장래를 위해선 금본위제를 도입하는게 좋다”고 주장한 뒤, 격론 끝 표결을 통해 8 대 7로 금본위제 도입이 결정됐다.

당시 아시아에서는 천 년 가까이 은화경제권이 작동하고 있었던 만큼 일본으로선 은본위제에 머무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일본 정계와 재계 실력자들이 금본위제 도입을 반대했던 이유다.

하지만 전문가들 주도로, 장기적 안목에서 시스템적으로 도입이 결정된 금본위제는 빠르게 뿌리를 내렸다. ‘글로벌 스탠더드’인 금본위제 도입 결정으로 일본은 청일전쟁 후 청나라가 지급한 배상금을 영국 런던에서 파운드화로 수령했고, 영국 내 은행에 이를 예치했다.

일본이 해외에서 자금을 차입하는 것도 용이해졌다. 1897년 일본은행은 홍콩상하이은행과 요코하마정금은행 등의 신디케이트를 통해 런던에서 군사공채 4300만엔어치를 발행했다. 1899년에는 9763만엔이 넘는 국채를 발행했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을 바탕으로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는 기반을 마련했고, 한국을 강점하는 길을 열었다. 전문가가 기초를 닦았고, 시스템으로 움직였던 일본은 그렇게나 무서웠다.

일본에서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 전문가를 중시하는 것은 화폐제도 조사회 설치 120년이 지난 요즘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것이 에너지 정책이다. 지난 9일에는 일본 경제산업성 자문기구인 ‘종합자원에너지조사회’가 분과회의를 열고 ‘국가 에너지정책 기본계획’ 개정방향을 논의했다.

조사회는 전력소비자인 업계 최고경영진과 공급자(도쿄전력) 측 인사, 대학이나 연구소의 전력 관련 전문 학자, 소비자단체 관계자, 환경운동가 등 29명의 각계각층 전문가로 구성돼 있다. 회의에선 전문적인 데이터에 기반한 논쟁이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됐다.
이런 일본과 대조적으로 한국은 전문가를 중시하기는커녕 전문가 경시의 ‘반(反)지성주의’가 확산되는 모양새다. 신고리 5·6호기 원자력발전소의 운명은 비전문가들이 결론을 낼 예정이다. 탈원전 정책을 주도한 인물은 라이트형제의 첫 비행기부터 최신 보잉 787기까지 한꺼번에 싸잡아 추락 확률을 구하는 식으로 원전사고 확률을 계산한 미생물학자라고 한다.

고위 관료 인선과 관련해선 ‘창조과학’ ‘유사 역사학’ ‘논문 조작’ 등 비과학적 사고가 얽힌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온라인상에선 그저 ‘OO는 너무 중요해서 전문가에게 맡길 수 없다’는 무책임한 문구만 돌아다닐 뿐이다.

100여 년 전 한국에선 전문가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막연하게 국가가 운영됐다. 그리고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 시스템적으로 무장했던 일본에 국권을 상실했다. 역사의 교훈을 다시 한번 생각할 때다.

김동욱 도쿄특파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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