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중 한 번 했다고 갑질상사"…커지는 몰래녹음 공포

입력 2017-08-11 20:33 수정 2017-08-14 12:59

지면 지면정보

2017-08-12A9면

합법 뒤에 숨은 통화 녹음

상대방 동의 없이 녹음해도 합법…제3자에 공개해도 손해배상 드물어
녹음파일 쉽게 짜깁기…불안 커져

휴대폰 카메라의 '찰칵' 소리처럼 녹음 땐 음성안내 법 개정안 발의
"폭언에 대한 약자 방어수단" 반박도
근 한 중소기업에서 일하다가 퇴사한 김모씨는 옛 거래처 소속 박모 과장의 전화를 받았다. 박씨는 퇴사 사유를 물어보며 김씨를 살갑게 대했다. 김씨는 고마운 마음에 회사에 대해 묻는 박씨 질문에 있는 그대로 대답해 줬다. 이는 소송을 위해 정보를 빼내려던 박씨의 계략이었다. 김씨와 통화 내용을 몰래 녹음한 자료는 법정 증거로 제출됐고, 김씨는 업계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재취업도 힘들어졌다.

중소기업 임원 A씨(52)는 작년 말 인사평가에 앙심을 품고 퇴사한 직원이 “그간 당신이 전화로 했던 폭언을 공개하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진땀을 흘렸다. 평소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 별명이 ‘젠틀맨’일 정도로 인망이 높았던 A씨였다. 20년 넘게 회사생활을 하며 욕설은 입에 담은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A씨는 “편집과 발췌에 따라 얼마든지 ‘갑질 상사’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며 “갑질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상황에서 구설에 오를까봐 몇 달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이뤘다”고 털어놨다.

통화 자동녹음 합법이라지만…

현행법상 통화 당사자라면 상대방 동의 없이 대화 내용을 녹음해도 형사 처벌받지 않는다. 통신비밀보호법이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청취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어서다. 즉 제3자가 아닌 통화 당사자는 상대 동의 없이 통화 내용을 녹음해도 불법이 아니다.

녹음 내용을 제3자에게 무단 공개하더라도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지는 경우는 드물다. 2013년 8월 수원지방법원은 비밀 녹음 사건 관련 판결문에서 ‘비밀녹취가 정당한 행위라면 불법행위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하지만 ‘정당한 행위’의 범위는 재판부와 사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게 법조계 판단이다. 부장판사 출신인 한 변호사는 “정당한 행위가 무엇인지는 명확한 이론이나 판례가 정립되지 않아 비밀녹취가 언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 법이 지나치게 통화 중 녹음에 관대하다는 게 법조계 시각이다. 이호선 국민대 법학과 교수는 “상대방에게 한 말이라고 해서 고스란히 이야기를 저장해 법정에 제출해도 된다는 건 아닐 것”이라며 “한국의 사생활 보호 인식이 미흡함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녹음 파일이 일단 공개되면 ‘마녀사냥’ 대상이 되기 쉬워진다는 점도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녹음 파일은 간단한 음향 편집 프로그램으로도 쉽게 짜깁기할 수 있어 폐쇄회로TV(CCTV) 등 영상 증거보다 조작이 쉽다. 2006년 경희대에서 일어난 성폭행 무고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무속인 권모씨는 무속문학을 연구하던 서정범 경희대 국문과 명예교수(당시 80세)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증거물로 제출된 녹음테이프는 조잡하게 조작된 증거물이었다. 고소 사실이 퍼지고 비난 여론이 일면서 학교 측은 이듬해 1월 서 교수를 직위해제했다. 이후 검찰 조사 결과 테이프가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명예가 회복됐지만 서 교수는 강단 복귀를 거부했다. 서 교수는 사건이 일어난 3년 뒤인 2009년 타계했다.

개인정보 보호 vs 갑질 대처 수단
불안이 증폭되자 관련 법안도 최근 발의됐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김광림 자유한국당 의원 등 10명은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을 지난달 20일 발의했다. 사용자가 통화 내용을 녹음하려는 경우 통신사는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 ‘찰칵’ 소리를 내도록 한 것처럼 통화 중 어느 한쪽이 녹음을 시작하면 “상대방이 녹음 버튼을 클릭했다”는 식의 음성 안내가 이뤄지도록 하자는 얘기다.

법안 찬성론자들은 ‘알림 시스템’으로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녹음 오남용 피해를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 의원은 “애플 아이폰이 통화 중 녹음 기능을 제공하지 않는 것만 봐도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이 개인정보 보호에 얼마나 민감한지 알 수 있다”며 “기업 콜센터에 전화하면 통화 내용이 녹음된다는 안내 멘트가 나오는 것처럼 녹음 여부를 알려 당사자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반면 약자가 ‘갑질’에 대처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반박도 나온다. 대학생 이모씨(22)는 올해 초 자동 통화녹음 기능 덕분에 폭언과 성희롱 발언을 일삼던 고용주에게 사과와 보상을 받았다. 이씨는 “증거자료를 찾던 중 사장의 욕설이 자동으로 녹음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며 “나도 모르게 녹음된 파일 덕분에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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