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가 대선 공약에 따라 대규모 빚탕감 대책을 그제 내놨다. 소멸시효가 끝난 공공 및 민간 금융권의 대출채권 25조7000억원(공공 21조7000억원, 민간 4조원)어치를 소각시킨다는 방침이다. 이로써 214만3000명의 채무기록이 전산과 서류에서 삭제돼 금융거래가 다시 가능해진다. 금융위는 소멸시효가 끝난 채권의 신속한 소각을 제도화·법제화하고, 금융권별로 자율 소각도 유도할 방침이다.

대책의 취지는 이해할 만하다. 상법상 돈 갚을 의무는 연체 시점부터 5년이지만(소멸시효 완성), 채권자의 신청에 따른 법원의 지급명령이나 채무자가 일부 상환한 경우 15~25년까지 연장된다. ‘죽은 빚’이 되살아나 추심과정에서 마찰을 빚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채권 소각을 통해 취약계층이 장기간의 채권추심에서 벗어나 재기할 수 있게 돕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금융위원회는 법정 최고금리를 연 24%(현재 연 27.9%)로 인하, 10년 이상 장기 연체자(1000만원 이하)의 빚탕감도 예고해 놓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새 정부의 국정방향인 ‘포용적 복지’를 금융에 적용해 이번 소각을 ‘포용적 금융’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취약계층의 금융지원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금융을 복지수단으로 여겨 대규모 빚탕감을 남발하면 부작용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이번 조치는 자칫 돈을 빌려도 “5년만 버티면 안 갚아도 된다”는 그릇된 신호를 줄 소지가 다분하다. 더구나 시효가 남은 연체 채무까지 탕감을 약속했으니 모럴해저드 우려도 팽배하다.

금융회사들은 ‘포용적 금융’으로 돈 떼일 위험이 커질 것을 걱정한다. 일부 금융권은 존립 위기라고 한다. 그럴수록 꼬박꼬박 빚을 갚아온 이들에게 부담이 전가될 것이다. 성실 채무자가 바보이자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국민행복기금과 금융공기업이 보유한 채권을 탕감해주는 것은 국민 혈세를 투입하는 것과 다름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채무조정, 빚탕감이 있었지만 점점 더 과감해진다. 금융은 신용과 자기책임 원칙의 토대 위에서만 제대로 작동한다. 원칙을 허물긴 쉬워도 다시 세우는 것은 수십, 수백 배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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