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빙~ 둘러싼 둘레길파도가 쉬어가라 손짓하네

찾는 이 그리 많지 않은 그저 한적한 어촌마을
새우젓 고장답게 마을 곳곳에 어구들이 잔뜩 쌓여 있고
수명을 다한 멍텅구리배는 역사의 뒷전으로 아스라이…

장벌해변서 진월교 넘는 길
바다는 연신 파도를 밀어내고 너른 갯벌엔 삶이 싹트는데…

낙월도 앞바다에 떠 있는 새우잡이 어선

굴은 달이 차고 기우는 데 따라 여물기도 하고 야위기도 한다
섬사람들도 굴처럼 살이 올랐다 야위었다 한다
섬사람들은 달의 자손이다
달이 바닷물을 밀었다 당겼다 하며 바다 것들을 키우면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소라고둥과 굴들을 얻어다 살아간다

(강제윤 시 ‘달의 후예’)


너른 갯벌 때문에 붙여진 이름 낙월도

상낙월도와 하낙월도를 잇는 연도제

전남 영광에 있는 염산 향화도항에서 출항한 낙월도행 여객선은 직항하지 못하고 먼 길을 돌아간다. 밀물 때면 물에 잠기고 썰물 때만 형체를 드러내는 모래 평원 풀등. 이 바닷속에도 1㎢에 이르는 거대한 풀등이 있다. 여객선은 풀등에 걸려 좌초할까 두려워 우회하는 것이다. 낙월도가 새우젓의 산지가 된 것도 새우들의 산란장인 이 풀등 덕이다.

상낙월도항에 잠시 기항한 여객선은 하낙월도항에 정박한다. 낙월도는 한 섬의 지명이 아니다. 상하낙월도 두 섬을 동시에 일컫는 이름이다. 낙월도(落月島)의 옛 이름은 진다리(진달이)섬 혹은 진월도(珍月島)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진월도로, 고산자 김정호(1804~1866)가 편찬한 《대동지지》에는 낙월도로 표기돼 있다. 낙월도가 진다리섬이 된 것은 백제가 폐망할 무렵 백제 왕족들이 배를 타고 피난을 가다 달이 지자 항로를 잃고 이 섬에 정착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전설은 전설일 뿐 달과 밀접해 보이는 이름들은 실상 달과는 무관하다.

상낙월도의 당산나무

낙월도 인근 해역은 너른 갯벌이 분포해 있다. 진다리는 진들, 즉 갯벌을 뜻한다. 진들 한가운데 있어서 진들섬, 진다리섬이라 불리다가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진월도(珍月島), 낙월도(落月島)로 바뀐 것이다.

별개의 섬으로 있던 상하낙월도는 갯벌 사이에 제방을 쌓아 만든 500m 길이의 연도제(하나의 섬처럼 두 섬 사이를 막은 제방)가 해수 유통을 방해해 갯벌이 점차 물러져 늪이 돼 갔다. 갯벌에 의지해 살던 섬사람들은 작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근래에 다시 제방의 일부를 트고 다리를 놨다. 물은 흘러야 마땅하다. 그래야 갯벌도 살고 사람도 산다. 갯벌은 다시 점차 본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낙월도는 전남 영광군 낙월면의 소재지다. 11개의 유인도와 41개의 무인도를 아우르는 낙월면 전체 인구는 700여 명에 불과하다. 1965년 인구가 4000명이었으니 급격한 인구 감소를 겪었다. 섬은 달이 차고 기우는 것처럼 그렇게 저물어 갔다.

새우잡이로 번성했던 새우 산지

상낙월도 입구에 있는 표지석

하낙월도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상하낙월도 두 섬 다 관광객들은 거의 없다. 섬에 빼어난 풍광이나 역사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적한 어촌 마을이다. 그래서 오히려 평화롭고 여유롭게 쉬다 가면 좋은 섬이다. 낙월도에는 장벌, 재계미, 큰갈마골 등 해수욕하기 좋은 해변이 있어서 여름이면 피서객들도 제법 찾는다. 그 밖에는 주말이나 연휴에 섬 둘레길을 걷거나 캠핑하기 위해 조금씩 찾아들 뿐이다. 그러니 식당도 따로 없다. 민박집 시설도 부족하다. 하지만 관광객이 적은 만큼 섬은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인심 또한 소박하다.

새우젓 고장답게 낙월도 곳곳에는 새우잡이에 쓸 어구들이 잔뜩 쌓여 있다. 낙월도는 옛날부터 새우 산지로 유명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는 전라도의 세 번째 갑부가 낙월도에 살았을 정도다. 전성기 때는 새우잡이 배가 400여 척이 넘은 적도 있었다. 지금 인구(320여명)보다 어선이 많았다. 그중 ‘멍텅구리배(해선망어선)’는 80척. 요즘 새우젓 산지로 유명한 임자도 전장포에는 당시 멍텅구리배가 15척 정도밖에 없었다. 보통 멍텅구리배에는 다섯명씩 승선해서 조업했으니 낙월도 배의 선원들만 400명이나 됐다.

한때 낙월도에는 술집과 다방이 10여 곳에 이를 정도로 유흥업도 덩달아 번성했다. 낙월도 사람들은 오랜 세월 전통 어선인 멍텅구리배로 새우를 잡았다. 바지선처럼 다른 배가 끌어주어야만 움직일 수 있어 멍텅구리배로 불린 무동력선. 그 배로 새우를 잡을 때는 상하낙월도 두 섬이 전국 새우젓 시장의 50%를 점유할 정도였다. 하지만 1987년 ‘셀마’ 태풍 때 멍텅구리배가 난파돼 선원들이 떼죽음을 당하면서 멍텅구리배는 어업의 역사에서 영영 퇴장당하고 말았다.

낙월도 사람들은 임자도 전장포보다 낙월도가 새우잡이의 원조라고 자부한다.

“전장포는 낙월서 헌 어구 가져다 새우잡이를 시작했어. 그런데 이제는 거기가 더 커져 버렸어.”

낙월도는 여전히 새우의 고장이다. 현재는 하낙월도에 20척, 상낙월도에 17~18척의 새우잡이 배가 있다.

아픈 역사로 기록되며 퇴장한 멍텅구리배

동력이 없는 일명 멍텅구리배

면사무소 부근에서 만난 노인은 평생을 섬에서 살았다. 노인은 낙월도를 비롯한 영광 바다 어장이 황폐화된 것이 1986년 영광원전이 들어서면서부터라고 주장한다. 원전이 건설된 뒤 뜨거운 물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에 바다 수온이 너무 높아져 물고기 서식 환경이 파괴됐다는 것이다.

과거 낙월도 새우젓이 명성을 얻은 데는 염산면 소금이 한몫했다. 염산면에서 나는 천일염과 낙월도의 질 좋은 새우가 결합돼 맛이 뛰어난 새우젓이 생산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낙월도는 일제 때부터 부자 섬으로 이름 높았다. 그때는 일본인들이 낙월도에 거주하며 어업조합을 관리했다. 일본 상선들도 낙월도까지 찾아와 새우를 사갔다.

“낙월서 난 니보시(삶아서 말린 새우)는 아지노모토란 일본 조미료 공장에서 수입해 갔어.” 일제 땐 낙월도에서 도쿄 유학생이 여섯 명이나 나왔고 “뱃사공 부인도 비로도(비단) 치마를 입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광복 후에도 낙월도는 여전히 부유한 섬이었다. 모두가 새우 덕이었다. “낙월도에는 전라도에서 세 번째 가는 갑부가 있었어. 김달선 씨라고. 새우잡이배 선주였지. 돈을 가마니로 져 날랐다고 해. 아주 왕 노릇을 했지.”

여객선의 신호수단인 종

낙월도 사람들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전통 새우잡이 어선 멍텅구리배가 위험한 배였다고 알려진 것이 억울하다. 1987년 7월 셀마 태풍으로 조업 중이던 낙월도의 멍텅구리배 12척이 난파돼 선원 51명이 떼죽음을 당한 적이 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섬 앞바다 물살이 센 어장까지 동력선이 끌어다줬다. 어장에 도착한 배는 거대한 나무 닻을 내려 정박했다. 좌우로 길게 뻗은 날개에 줄을 매달아 그물을 내리고 조류를 따라 그물 입구로 새우가 들기를 기다렸다가 새우를 건져 올렸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바다에 내려앉은 비행기 같았다.

당시 일부 멍텅구리배에서 선원들에 대한 구타 협박 등 인권 침해가 컸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셀마 태풍 때 멍텅구리배가 난파되는 사고를 당한 것은 배의 구조에 결함이 있어서도 선주가 사고가 나도록 방치해서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고는 잘못된 일기예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멍텅구리배 선원들은 일기예보에서 태풍이 비껴간다고 해서 피신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치 태풍이 오는데도 선주들이 무리하게 조업을 시켜 사고가 난 것처럼 알려져 억울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셀마 태풍으로 난파된 멍텅구리배에는 낙월도 주민인 선장 세 명과 선원들도 여럿이 함께 타고 있다가 수장을 당했으니 주민들 증언도 일면 타당해 보인다. 사건의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전통문화 우리가 지켜야 할 ‘오래된 미래’

소담한 풍경의 낙월도 해수욕장

하낙월도와 상낙월도 두 섬 다 둘레길이 조성돼 있으나 찾는 이들이 많지 않다 보니 관리는 소홀한 편이다. 하낙월도 둘레길은 장벌해변에서 전망대, 외양마지, 진월교로 이어진다. 시야가 탁 트여 걷는 내내 바다와 섬들을 바라볼 수 있다. 가파른 비탈도 없고 거리도 3㎞ 남짓이니 여유롭게 산책하기 좋다. 상낙월도 둘레길은 상하낙월도를 연결해 주는 진월교에서 시작되는데 쌍복바위, 누엣머리, 당산, 큰갈마골 해변, 큰애기고랑, 재계미해변, 달바위를 거쳐 상낙월항까지 그대로 섬을 한 바퀴 돌게 돼 있다. 7㎞ 남짓한 길이니 천천히 걸어도 두세 시간이면 충분하다. 상낙월도 최고봉은 98m, 하낙월도 최고봉은 109m에 불과해 산이라기보다는 구릉에 가깝다. 그런 까닭에 둘레길은 그저 산책로처럼 걸을 수 있다. 걷는 중간 해변에서 놀 수도 있고 당산 숲 그늘 아래 쉬었다 갈 수도 있다.

상낙월도 당산 숲은 신령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이 당산의 수호신은 현풍 곽씨 할머니다. 16세기 말 재계미로 처음 들어와 살았던 입도조 할머니다. 예전에는 정월 초하룻날이면 무당을 불러 당산 나무 아래서 곽씨 할머니를 신주로 모시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대동제를 올렸다. 박정희 정부 시절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당제도 지내지 못하게 됐다. 미신타파를 이유로 정부에서 금지했기 때문이다. “당제가 없어지면서 마을이 더 삭막해졌어. 대동의식도 없어지고. 유대가 잘 안 돼.”

그래서 섬 노인들은 대동제를 부활시키려 노력 중이다.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파괴된 우리 전통문화가 어디 대동제뿐일까. 어둠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더 늦기 전에 되살려야 할 전통문화에 우리가 지켜야 할 ‘오래된 미래’가 있다.
여행팁

<먹거리> 영광은 굴비의 고장이다. 칠산 바다에서 더 이상 조기가 잡히지는 않지만 영광읍과 법성포 일원은 여전히 굴비 생산의 메카다. 특히 법성포는 굴비의 탄생지답게 상가 대부분이 굴비 가게이거나 굴비 음식점들이다. 낙월도 오가는 길에 법성포에 들러 굴비도 사고 굴비 정식이나 굴비 백반을 맛보는 것도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굴비 만나러 가는 김에 한국에서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마을 숲 중 하나인 법성포 숲정이 탐방도 빼놓지 마시라. 영광의 또 하나 특산품은 모싯잎 송편이다. 영광 버스터미널 부근 떡집에 들르면 보다 토속적인 맛의 모싯잎 송편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남도 전통술 품평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대마주조장에서 만든 증류식 소주와 보리향 탁주도 영광의 대표적 지역 술이다. 낙월도에는 식당이 따로 없다. 민박집에 숙박을 해야만 식사할 수 있다. 민박집 주인에게 미리 부탁하면 낙월도 인근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민어나 병어, 갑오징어 등 제철 생선회를 맛볼 수도 있다. 여객선은 육지로 편입된 연산면 향화도항에서 하루 세 차례 왕복한다. 오전 7시30분, 오전 10시30분. 오후 2시30분 편도 한 시간 소요.

강제윤 시인은

섬 여행가. 지난 10년간 한국의 사람 사는 섬 400여 개를 걸으며 글과 사진으로 섬과 섬사람들의 삶을 기록했다. '인문학습원' 섬학교에서 매월 한 번씩 4년째 섬 답사를 이끌고 있다. 《통영은 맛있다》 《자발적 가난의 행복》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서울, 인천, 경남 통영 등에서 섬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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