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황필상 전 수원교차로 대표가 7년여를 끈 증여세 소송에서 승소했다. 그는 수원교차로 주식 90%(당시 평가액 180억원)를 자신이 세운 장학재단에 기부했다가 140억원의 ‘세금 폭탄’을 맞았다. 가산세까지 붙어 220억원으로 불어난 세금 때문에 살던 아파트를 압류당하기도 했다. 기부 주식이 회사 지분의 5%를 넘으면 초과분의 50%에 증여세를 물리기로 한 이른바 ‘5% 룰’에 발목을 잡힌 것이다. 그는 재산 세습이나 세금 회피 목적과 무관한 ‘선의의 주식 기부’에 과세하는 것은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며 항소했고 마침내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이번 판결은 한국에서도 선진국처럼 기업가가 대규모 기부에 나설 수 있도록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에선 황 전 대표처럼 자수성가형 기부왕이 많다. 그는 서울 청계천 판자촌에서 태어나 늦깎이로 대학에 들어갔다. 수원교차로를 창업해 큰돈을 모았지만 장학금을 대느라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이종환 삼영그룹 창업자도 2002년 관정 이종환교육재단을 설립하고 지금까지 8000억원을 출연했지만 무일푼으로 회사를 키운 인물이다.
미국은 ‘자선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기부 활동이 왕성하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와 그의 부인은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세워 40조원 넘게 출연했다.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등도 거액을 잇달아 내놓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부자들의 선의를 세금 회피하려는 꼼수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버핏에게 ‘단지 절세의 달인일 뿐’ ‘세법이 기부왕을 만들었다’ 등의 비아냥이 쏟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버핏이 자녀들에게 “재단에 기부할 때 상속·증여세 대상이 되지 않게 조심하라”고 조언한 내용이 알려져 더욱 그런 소리를 듣게 됐다.

미국에선 공익재단에 돈이나 주식을 기부하면 대부분 세금을 내지 않는다. 상속세를 피하면서 재단에 기부한 몫만큼 기업 의결권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기업인의 편법 상속을 막는다며 가혹한 세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50조원을 기부하기로 한 저커버그도 한국에서라면 절반을 증여세로 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미국 부자들과 달리 기부에 인색하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정작 기부를 하고 싶어도 세금이 가로막고 있었으니 딱한 노릇이다.

이런 상황에서 ‘순수 기부에 대한 과세는 부당하다’는 판결이 나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황필상 판례’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자유로운 기부 문화가 활성화됐으면 한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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