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라이프

골프 꿈나무들 가르치는 68세 '호랑이 훈장님'
독학 입문해 환갑 넘어 KPGA 시니어 프로

홀컵 1m 이내 떨굴 만큼 웨지 잘 쳐야 긴 클럽 레슨
"룰 어겨 4벌타 받은 톰슨, 한국 선수였으면 난리날 것"
일등주의 골프문화 바뀌어야
“렉시 톰슨 사건이 한국 선수에게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아찔합니다.”

‘미스터 쓴소리.’ 골프계에선 종종 그를 이렇게 부른다. 민감하고 불편한 이슈를 거침없이 지적하는 특유의 직설 화법 때문이다. 인천 영종도 스카이72 골프연습장 드림레인지 양찬국 헤드프로(68·사진) 얘기다. 톰슨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부터 ‘꼬장꼬장함’이 읽힌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메이저대회 ANA인스퍼레이션에서 톰슨이 퍼팅하기 전 공의 위치를 바꾸는 오소(誤所)플레이로 4벌타를 받은 뒤 결국 유소연에게 우승컵을 넘겨준 해프닝이다.

“톰슨은 곧바로 벌타를 받아들였어요.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 같았으면 선수 팬에 부모까지 나서서 따지고 경기 중단되고 난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골프 기술보다 사람됨이 먼저

무엇이 이 백전노장의 칼날을 그들이 아니라 ‘우리’로 향하게 했을까. 미국 생활 20년을 포함해 43년 골프에 빠져 살아온 그는 ‘의미를 쏙 뺀 채 껍데기만 즐기는’ 한국적 골프문화에서 그 뿌리를 찾았다. 결과와 재미만 중시하다 보니 과정과 의의가 무시되고 성적과 돈만 남았다는 지적이다.

“지금까지 4000명 넘게 가르쳤을 거예요. 결론은 기술만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인성(人性)과 지식이 함께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기초지식과 도덕성이 부족한 ‘골프 기계’가 대량 배출되는 겁니다. 슬쩍 양심을 속여도 어물쩍 넘어가고, 그런 사람들이 또 승승장구하기도 하고….”

연습장에서도 그는 ‘호랑이 훈장’ 노릇을 자처한다. 뛰어다니거나 인사하지 않는 학생에겐 곧장 불호령이 떨어진다. 기본이 안 됐다고 판단한 제자에겐 곧바로 “짐을 싸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LPGA투어에서 뛰고 있는 이미향, 박성현 등 ‘거물급 제자’들은 아직도 그를 ‘사부’로 모시며 따른다.

짧은 클럽부터 장악해야

그는 기초를 중시한다. 레슨도 그렇다. 입문자에게 가장 짧은 클럽부터 손에 쥐여주는 게 다른 프로들과 다르다. “기초 수준의 짧은 거리도 장악하지 못하는 사람이 긴 거리를 잡겠다는 건 탐욕”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짧은 웨지로 목표한 거리에 1m 이내로 척척 붙이기 시작할 때쯤에야 그다음 긴 클럽으로 넘어가니 드라이버를 잡는 데 1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는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레슨을 지향한다. 골프 백과사전처럼 즉문즉답에 능한 것도 그래서다. 이런 식이다. ‘어드레스를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물었을 때다.

“화장실에서 ‘쉬’할 때 포즈 아시죠? 그게 사실 가장 안정적인 자세예요. 본능적으로 몸의 균형을 잡는….”

어드레스 시 다리를 어느 정도 벌리는 게 좋을까. “제자리높이뛰기를 해보세요.” 높이 뛰어 착지했더니 이런 말이 돌아왔다. “지금 그 양발 너비가 가장 이상적이에요. 자신의 체중을 몸이 가장 자연스럽게 균형 잡아주는 너비죠.”

한 가지 더 물었다. ‘나이 지긋한 골퍼들이 비거리 늘리는 방법이 없을까요?’ 티를 높게 꽂고 공 뒤 20㎝ 지점에 드라이버 헤드를 놓고 어드레스를 해보란다. “공을 올려치는 상향타격이 되기 때문에 비거리가 10야드 이상 곧바로 늘 겁니다. 물론 그립 끝이 임팩트 때 배꼽을 향하도록 꼭 신경써야 하고요.”

칠순 잔치서 마지막 레슨 꿈
그의 형제들은 요즘말로 ‘먹물’이다. 서울대 의대, 서울대 공대, 미국 버클리대 등을 나와 다들 저명인사가 됐다. 하지만 유달리 그는 몸 쓰는 일을 더 잘했다. 중학교 때부터 익힌 태권도가 6단. 해병대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은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의기소침해 있던 그를 군인이던 아버지가 골프의 세계로 이끌었다. 입장료만 내면 하루종일 라운드가 가능했던 1974년, 그의 나이 스물다섯 때였다. 하루종일 골프에 몰입했다. 정확히 4개월17일 만에 싱글이 됐다. “남들 4년17개월 연습할 걸 그 시간에 다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이후 그의 실력을 키운 건 내기 골프다. 이미 국내에서 7언더파까지 친 뒤 1980년 미국에 건너갔을 때였다. 한가닥씩 하던 동포들이 내기 골프를 청해왔다. “최저 임금이 3달러가 채 되지 않던 때에 하루 100달러를 벌었죠. 실력도 하루가 다르게 늘었고요.”

그는 2000년 한국에 돌아온 뒤 스카이72골프장에서 매일 한두 번 라운드하는 게 일과다. 제자들의 실전 레슨과 수습 캐디 교육 등을 위해서다. 1년에 족히 500라운드는 되는 셈이다. 특별한 운동 없이도 감기 한번 걸리지 않는 강철체력의 비결이다. 환갑을 넘긴 2011년엔 한국프로골프(KPGA) 프로 자격까지 땄다.

“일흔이 되기 전 시니어투어에서 1승을 하는 게 목표예요. 50대 초반의 팔팔한 친구들을 이기려면 실전감각과 체력을 길러야죠.”

한 가지 꿈이 더 있다. 얼마 후면 닥칠 칠순 잔치에서 ‘화려한 은퇴’를 선언하는 것이다. “제자 400명을 드림레인지 원형 타석에 세우고 제가 가운데에서 헤드 마이크로 마지막 레슨을 하는 게 꿈이에요. 시작도 끝도 깔끔하게 해야죠.”

영종도=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