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이민자의 아들 에드워드 펜스 소위가 한국에 도착한 것은 1952년. 중공군의 대공세로 철의 삼각지대가 피로 물든 혈전의 한복판이었다. 아래위로 요동치던 전선이 38선으로 좁혀지자 양측은 최강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중공군과 북한군 29만여명에 유엔군 25만명이 맞선 상황. 하루에도 몇 번이나 뺏고 뺏기는 고지전이 계속됐다. 백마고지 전투와 저격능선 전투 등이 이어지던 때였다.

미 육군 45보병사단에 소속된 펜스는 폭찹힐(일명 포크찹 고지) 전투에 투입됐다. 폭찹힐은 지금의 경기 연천 비무장지대에 있는 천덕산 일대를 가리킨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양이 폭찹(pork chop)이라는 돼지고기 요리를 닮아서 붙은 별명이다. 우스꽝스런 이름에 별로 높지도 않은 이 언덕에서 가장 길고 격한 혈투가 벌어졌다. 1952년 5월부터 휴전 직전인 1953년 7월까지 공방전을 펼쳤으니 1년이 넘는다. 미군과 태국군, 콜롬비아군까지 참전한 다국적 전투였다. 1959년 그레고리 펙 주연 영화 ‘폭찹힐’로 더 유명해진 전투다.
하루에 8만발의 포탄을 쏟아부어도 중공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진지를 구축하고 나면 새벽에 기습해 오고, 신규 병력을 투입하면 더 많은 인해전술로 덤볐다. 병사들은 “벙커와 참호, 포탄구덩이와 바위가 뒤엉킨 미로 속의 피바다”라며 치를 떨었다. 며칠 사이에 9차례나 고지를 뺏기고 되찾기도 했다. 마지막 7월 전투에서만 중대장 4명 등 미군 243명이 전사하고 916명이 부상했다. 163명의 유해는 끝내 찾지 못했다. 카투사도 15명이 전사하고 120명이 중상을 입었다. 중공군은 1500여명이 죽고 4000여명이 후송됐다.

1년2개월 동안 계속된 이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운 펜스 소위에게 미국은 1953년 동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로부터 64년 뒤, 미국 부통령이 된 아들 마이크 펜스가 한국 땅을 밟았다. 도착하자마자 현충원부터 달려간 그는 이튿날에도 아버지의 전투 현장이었던 비무장지대를 방문했다. 양국의 혈맹 의지를 거듭 확인하는 행보였다. 6·25에는 펜스 소위를 비롯해서 16개국 190만명의 젊은이가 참전했다. 오늘 우리가 이룬 성장과 번영은 이들 덕분에 가능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펜스 부통령에게 선물한 백자 접시에 이런 사연이 녹아 있다. 에드워드 펜스 소위가 훈장을 받는 모습을 새겨 넣은 것. 전쟁의 참화를 뚫고 달려왔던 아버지 펜스와 한반도 위기 상황에서 전용기를 타고 날아온 아들 펜스의 모습에서 한·미동맹의 새로운 미래를 본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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