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미 씨 사비나미술관 개인전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 전시된 유현미 씨의 작품 ‘284’. 사비나미술관 제공

시간, 나이, 월급, 기록 등 우리 일상은 통상 숫자로 표시된다. 사람들은 숫자가 자신이 처한 현실과 환경을 객관적으로 설명해준다고 믿기 때문에 강한 신뢰를 느낀다. 숫자 하나면 열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해진다. 숫자는 언어로 생길 수 있는 작은 오역도 허락하지 않는다. 0.0001이라도 오차 없는 완역은 오직 숫자만이 할 수 있다.

첨단 디지털 사회에서 숫자가 가지는 다층적인 상징과 의미를 되새기는 이색 전시회가 마련됐다. 지난 7일부터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술가 유현미 씨(50)의 개인전이다. 서울대와 미국 뉴욕대에서 미술을 공부한 유씨는 지난 20년간 조각, 회화, 사진 등 장르를 넘나들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시각예술로 승화해왔다. 뉴욕 첼시의 크리스틴 로즈갤러리를 비롯해 브롱크스뮤지엄, 뉴저지 스테이트뮤지엄, 얼터너티브뮤지엄 등에서 전시 활동을 벌이며 미국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국내에서는 일우사진상과 모란미술상 우수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다음달 7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는 ‘수(數)의 시선’이다. 일본 여성 작가 오가와 요코의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영감을 받아 사물과 공간, 사람조차도 그만의 수식으로 풀어낸 영상과 설치작품 여덟 점을 내놨다.

유씨는 수학자의 시선으로 검은색과 흰색을 사용해 사물과 공간을 숫자의 세계로 끌어들여 작품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전시장을 흰 종이로 보고 그 안에 검은 선과 숫자를 배치했다. 면과 선, 백과 흑이라는 형과 색이 즉흥적으로 이어져 마치 거대한 드로잉북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만든다. 유씨는 “작품 속 숫자는 조각되고 설치된다”며 “일상적인 공간을 3차원적인 동시에 2차원적이고 4차원적이란 느낌이 들도록 연출하는 것이 작업 과정의 핵심 요소”라고 설명했다.
설치작품 ‘수학자의 시선’은 2차원적인 검은 선과 숫자에 둘러싸인 한 여성을 3차원 공간에 배치해 4차원 미감으로 풀어냈다. 얼굴에 검은 선을 칠한 사람, 하얀 벽면의 검은 띠, 다양한 숫자로 공간을 꾸며 세상의 우연한 질서와 이치를 수식(數式)으로 보여준다. 맞은편에 설치된 작품 ‘1984’는 숫자로 정보를 나르는 컴퓨터 시스템에 24시간 감시당하는 현대사회를 들춰냈다. 빅 브러더에 지배당하는 미래 세계를 예측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상기시킨다.

지하 전시장에서는 12개 작품 제작 과정을 고스란히 영상으로 담아 상영한다. 숫자와 선들이 입체 공간에서 이어지고 흩어지면서 초현실적인 착시감을 전한다. 숫자를 미학적 요소로 활용한 이유가 궁금했다. 유씨는 “숫자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언어 중 가장 육체적인 동시에 정신적”이라며 “수의 이런 두 가지 요소를 통해 예술 혹은 철학의 속성과도 일치하는 부분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숫자와 공간이 이룬 수식이 자연인 동시에 예술이고, 철학임을 생생하게 일깨워주고 싶다는 얘기다. 그는 “수식은 나와 타인이 맺는 삶의 공식”이라며 “수와 공간, 시간, 사람을 수식으로 아름답게 화해시켜보려 했다”고 덧붙였다. (02)736-4371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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