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깨우는 한시 (23)]

청산영리녹포란(靑山影裡鹿抱卵) 백운강변해타미(白雲江邊蟹打尾)

입력 2017-02-08 18:06 수정 2017-02-09 13:03

지면 지면정보

2017-02-09A33면

청산영리녹포란(靑山影裡鹿抱卵)
푸른 산의 그늘 속에서 사슴이 알을 품고

백운강변해타미(白雲江邊蟹打尾)
흰구름의 강변에서 바닷게가 꼬리를 치네.
방랑시인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이다. 어떤 이는 김립(金笠)으로 불렀다. 본명보다 더 유명한 별명 덕분에 무덤이 있는 강원 영월군 하동면은 2009년 ‘김삿갓면’으로 개명했고 문학관까지 건립했다. 특히 이 작품은 오래전에 ‘허황된 시(虛荒詩)’라는 딱지가 붙은 상태였다. 하지만 세월이 바뀌면서 ‘오도송(悟道頌·깨달음의 노래)’의 반열에 오를 만큼 대표작이 됐다.

젊은 시절 그는 열심히 과거시험 준비를 하던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노력 끝에 급제한 본인의 답안지가 숨겨진 가족사를 거칠게 비난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번민하다가 결국 가출했다. 방랑을 통해 참회하면서 길(道)에서 숙식을 해결하다 보니 저절로 도(道·인생공부)가 닦였다. 어느 날 범생이 김병연과 반항아 김립이 결코 서로 다른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을 낳는 사슴, 꼬리 달린 바닷게”라는 시로써 두 경계가 사라진 통섭의 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반대로 일제강점기 효봉(曉峰, 1888~1966) 선사는 떠돌이가 아니라 붙박이로서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 토굴에서 참선하다가 “바다밑 제비집엔 사슴이 알을 품는(海底燕巢鹿抱卵)” 융합의 이치를 깨닫고서 봉해놓은 무문관을 박차고 나왔다.

덧붙여 김삿갓은 “석양에 절로 돌아가는 승려는 상투가 석 자이고(夕陽歸僧紒三尺), 다락에서 베짜는 여인은 불알이 한 말이네(樓上織女囊一斗)”라는 파격적 표현까지 맘껏 구사했다. 승속(僧俗)과 남녀(男女)라는 외형적 분별의 틀까지 뛰어넘은 것이다. 그로부터 몇백 년 후 가수 김광석(1964~1996)은 “남자처럼 머리깎은 여자/ 여자처럼 머리 긴 남자… 번개소리에 기절하는 남자/ 천둥소리에 하품하는 여자”라는 쉬운 노랫말로써 난해한 한시의 이해를 도왔다. 사실 김삿갓이나 김광석은 장발족이지만 삭발한 스님네들의 삶이랑 별반 다를 바 없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선가(禪家)에서 동안거(冬安居)를 마친 정월대보름날, 허황시를 오도송 삼아 읊조려도 해제(解制) 분위기에 그런대로 어울리지 않겠는가.

원철 < 스님(조계종 포교연구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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