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 기자의 베트남 리포트]

동남아시아 잠룡, 베트남 금융시장 '빅뱅'

입력 2016-12-25 15:19 수정 2016-12-26 11:35
상장했다하면 주가 폭등, 공모주 시장 '대박 행진'
호치민거래소는 요즘 ‘공모주 대박’ 열기에 휩싸여 있다. 상장했다하면 연일 상한가다. ‘사이공 맥주’를 만드는 사베코(SABECO) 주가는 공모가 대비 벌써 두 배 뛰어 시가총액이 40억달러를 넘어섰다. 불과 며칠 만의 일이다. 베트남 항공업계 2위이자 LCC(저비용항공사)인 비엣젯의 기업공개(이달 말 예정)엔 JP모간, BNP파리바, 드래곤캐피탈 등 글로벌 투자자들이 몰리면서 수요가 공모 예정물량을 훌쩍 넘어섰다.

○기회의 나라 베트남

비엣젯 공모 열기는 베트남이 ‘금융 신천지’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달 말 기업공개에 앞서 기관투자가들을 대상으로 주식 20%를 얼마씩 배정할 지를 결정한 날인 지난 16일, 베트남 호치민 증권가(街)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물량 배정을 둘러싸고 투자자들 간 치열한 신경전이 오갔다. 민영 기업인 비엣젯은 국적 항공사인 베트남항공과 차별화된 서비스로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늘리고 있는 회사다.

결과는 비엣젯의 승리였다. JP모간 등 글로벌 ‘큰손’들조차 신청 물량의 15% 수준 밖에 받지 못할 정도로 기관 수요가 몰리면서 비엣젯은 단숨에 10억달러 이상을 조달했다. 아시아나항공의 시가총액이 1조원에 못 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금액이다. 한국투자, 미래에셋, 피데스 등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국내 자산운용사들도 물량 확보에 뛰어들었지만 게중엔 한 주도 받지 못한 곳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나스건설도 공모 이후 주가가 5배 가량 뛰었다. 주가가 지나치게 급등하자 작전세력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을 정도다. 비나밀크의 시가총액은 한화로 약 8조원에 달한다.

베트남 정부의 민영화 정책에 따라 증권시장 ‘데뷔’를 앞둔 ‘대어’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어서 베트남 증시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내년 민영화 예정인 국영 손해보험사 바오민이 대표적인 사례다. 업계 3위로 국내에서도 한화, 교보생명 등이 지분 인수에 참여를 검토 중이다. 베트남 국영기업은 숫자로는 전체 기업의 1%에 불과하지만 베트남 GDP(국내총생산)의 2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덩치가 크다.

국영기업들 대부분이 시장 내 독과점 지위를 누리고 있는 터라 이들 기업을 잡으려는 물밑 싸움도 치열하다. 사료에서부터 물류, 외식까지 베트남 소비시장을 ‘평정’하겠다고 나선 CJ는 베트남의 국영 육가공업체를 인수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KOTRA 등에 따르면 정부 지분이 100%인 베트남 기업 숫자는 올 9월 기준 695개에 달한다.

○제조업에 치우친 베트남 투자
미래에셋대우가 호치민법인의 자본금을 1000억원으로 증자하려는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박현주 회장은 상업용 빌딩 등 부동산 투자에도 적극 나서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경제성장률이 2%대로 떨어지는 등 ‘한계돌파’를 위해선 베트남이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한다는 의지다.

국내 금융회사들의 행보는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한 차례 고배를 마셨던 터라 더욱 의미있다는 평가다. 당시 한국투자, 미래에셋 등이 모집한 베트남펀드는 시가총액이 4조원에 불과한 호치민증권거래소에 약 1조4000억원 가량을 투자했었다. 하지만 금융위기로 외국인 자금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베트남펀드들은 대규모 손해를 입었다. 호치민 증권업계 관계자는 “그때만해도 베트남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있었다”며 “투자자들에 대한 도덕적 해이라고 할 정도로 무모한 투자였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대(對)베트남 투자는 공장을 세우는 등 직접투자에 집중돼왔다. 올 상반기 누계 기준으로 한국이 베트남에 투자한 돈은 총 485억1000만달러에 달한다. 제조업과 부동산 및 건설이 각각 68.8%, 21.7%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호치민증권거래소의 시가총액이 약 40조원으로 성장하는 사이 한국의 투자액은 고작 7000억원에 머물렀다. 이 중 공모펀드는 약 3000억원에 불과하다.

기회의 문이 열렸음에도 베트남 증권 및 자산운용사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나가야 할 처지다. 비엣젯 공모만해도 그룹의 계열 증권사가 주관사를 맡았을 정도로 토종 증권사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현지 증권업계 관계자는 “한국 증권사도 그룹 물량을 처리하면서 성장했다”며 “베트남도 한국식 모델을 따라간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자산운용 시장에선 영·미계에 뒤쳐져 있다. 영국계인 드래곤캐피탈이 베트남 자산운용시장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제조는 삼성, 금융은 드래곤’이란 말이 현지에 회자될 정도다. 베트남 증시가 폭발하자 드래곤캐피탈은 한국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베트남 전용 펀드를 모집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주 투자 ‘관심’

국내 자산가들의 베트남 투자 열기도 뜨거워지고 있다.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2000년 초 IT 광풍,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의 주가 급등에 이어 세번째 찾아온 기회”라며 “새 미국 대통령인 트럼프발 리스크 등으로 당분간 국내 주식시장이 얼어붙을 가능성이 높아 베트남 시장에 대한 거액 자산가들의 문의가 급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증권, 은행, 보험 등 금융주들이 유력한 투자 후보로 거론된다. 한화생명 호치민법인 관계자는 “베트남 보험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라며 “생명보험 시장만해도 소멸성 보험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해 향후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보험사들의 자산이 커지면 이를 맡아서 운용할 증권 및 자산운용사들의 기업 가치도 덩달아 커질 전망이다.

다만, 베트남 업종별 주요 상장회사의 주가가 지나치게 고평가돼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이트맥주만해도 시가총액이 5000억원 안팎인데 비해 사이공맥주를 만드는 사베코는 4조원을 훌쩍 넘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내수주들은 옥석을 가리기가 쉽지 않다”며 “식음료주만해도 롯데가 될 지 해태가 될 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호치민=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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