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닥터 코퍼(Dr. Copper)

입력 2016-11-21 17:24 수정 2016-11-21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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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2A39면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했다는 미다스는 실존 인물이다. 기원전 700년께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프리기아의 왕이다. 미다스 전설이 실화일 리는 만무하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다. 당시 소아시아는 아연이 흔해 구리와 아연을 섞은 황동을 처음 주조한 지역이다. 황동은 청동과 달리 황금색이다. 훗날 그리스인들이 소아시아의 번쩍이는 황동에 매료돼 미다스 전설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샘 킨, 《사라진 스푼》)

구리(銅)의 어원을 보면 이런 추정의 신빙성이 좀더 커진다. 로마시대 구리 산지가 바로 터키 밑의 키프로스섬이었다. 구리를 ‘키프로스의 금속’이란 의미로 ‘cuprum’으로 불렀고 이 말이 현대 영어의 ‘copper’가 됐다.

원자번호 29번(원소기호 Cu)인 구리는 은(銀) 다음으로 전기와 열 전도율이 높은 유용한 금속이다. 지구상에 널리 매장돼 있고 은과 달리 저렴하게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약 6000년 전 수메르인이 청동기시대를 연 이래 고대부터 무기, 화폐, 조각상, 장식품 등에 사용됐다. 현대에도 전선, 냉난방 배관, 라디에이터, 지붕재 등에 필수 금속이 구리다.
구리는 주로 합금으로 쓰인다. 주석, 아연, 니켈과 섞으면 각각 청동(bronze), 아연황동(brass), 백동(cupronickel)이 된다. 금관악기는 황동으로 만들기에 합주대를 브라스밴드라고 부른다. 100원, 500원짜리 동전이 백동이다.

살충·살균·항균 효과도 구리의 특징이다. 중세 때 목선을 갉아먹는 따개비 홍합 등을 막는 장치로 배 밑바닥을 구리로 씌웠다. 구리 표면에는 생물이나 세균이 서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인체에는 거의 무해해 사람 손을 많이 타는 동전, 문 손잡이, 계단 난간 등에 구리가 들어간다. 우리 선조들도 놋쇠로 불리는 황동 그릇을 많이 썼다.

구리 용도가 더욱 확장된 계기가 일명 재향군인병(病)이다. 1976년 여름 미국 필라델피아의 재향군인대회 참석자들이 집단 발병해 34명이 사망했다. 원인은 냉방장치의 냉각수에 서식한 레지오넬라균 탓이었다. 이에 따라 에어컨 배선, 수도관 등을 동파이프로 대체하는 게 필수가 됐다. 지금도 구리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최근 트럼프 당선 이후 구리 국제시세가 급등해 ‘닥터 코퍼(구리박사)’라는 신조어가 자주 회자된다. 구리는 제조업 전반에 사용되고 유가처럼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실물경기 판단 지표로 유용해 박사로 의인화한 것이다. 경기침체의 긴 터널에서 닥터 코퍼의 등장이 반갑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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