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52주년 특별기획

나도 모르게 입은 갑(甲)옷

내가 하면 권리행사, 네가 하면 갑질
한국인, 자신이 을(乙)이란 인식 강해

가해자 42%가 직장 상사·선배
일상적으로 '갑질' 일어나
정치·법조인 '갑질 지수' 고위험군
“당신은 ‘갑(甲)질’을 한 적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열 명 중 아홉 명꼴로 손사래를 쳤다. 반대로 살면서 갑질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사람은 열 명 중 다섯 명 이상이었다. 갑질했다는 사람은 없는데 갑질을 당했다는 사람은 넘친다. 이유가 뭘까. 정치인이나 재벌 3세 같은 극소수가 다수에게 갑질을 해서일까. 김수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 구성원은 자신이 타인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약자, 즉 을(乙)이라는 인식이 강하다”며 “그러다 보니 자신이 갑질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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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60% “甲 성격 때문에 발생”

한국경제신문이 마크로밀엠브레인에 의뢰해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4일까지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55.8%가 ‘갑질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반면 ‘갑질을 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14.5%에 그쳤다. 갑질 피해 경험자가 갑질 가해 경험자보다 네 배가량 많은 셈이다.

이런 차이는 갑질 피해 및 가해 빈도에서도 나타났다. 갑질을 당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이들 중 12.7%는 ‘최근 1년간 10회 이상의 갑질을 당했다’고 했다. 2회 미만이라고 답한 갑질 피해자는 32.0%였다. 하지만 갑질 가해 경험이 있는 이들 가운데 ‘최근 1년간 10회 이상 갑질을 했다’고 답한 응답자는 4.1%에 그쳤다. 2회 미만이라고 답한 비율은 절반 이상인 53.8%였다.

갑질 피해 경험자 가운데 41.8%(복수응답 가능)는 ‘직장상사 및 학교 선배가 가해자’라고 지목했다. 갑질이 일상생활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기업 오너 및 사장’이 30.3%로 그 뒤를 이었다. 거래 기업 임직원(27.6%), 공무원(25.1%), 의사 및 간호사(14.2%) 등도 주요 갑질 가해자로 꼽혔다.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권력자의 갑질보다 일상 속 갑질이 더욱 근절하기 어렵다”며 “권리를 누리기에 앞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해 주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말했다.

갑질 가해자와 갑질 피해자가 생각하는 갑질의 이유도 달랐다. 갑질을 당한 이들은 갑의 성격(61.1%)과 과거 관행(46.1%·복수응답 가능) 때문에 갑질이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반면 갑질한 이들은 ‘업무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아서’를 가장 큰 이유(49.7%)로 꼽았다. ‘자신의 성격 및 관행 때문에 갑질이 발생한다’고 답한 비율은 각각 19.3%, 13.8%에 그쳤다.

정치인·법조인이 갑질 가장 심해

갑질 정도가 가장 심한 부류로는 정치인이 꼽혔다. 응답자에게 주요 직업군의 갑질 정도를 0점(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부터 10점(심각한 문제가 있다)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요청했다. 그 평균을 100점 만점으로 환산한 결과, 정치인 갑질 지수는 87.7점이었다.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9.2%가 정치인 갑질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
다음으로는 검사와 판사, 변호사 등 법조인(82.9점)이었다. 응답자의 41.0%가 법조인의 갑질이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기업 오너·사장(80.6점)과 의료업계 종사자(78.6점), 공무원(77.2점)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갑질’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많이 떠오르는 직업은 기업 오너 및 사장(35.8%), 정치인(26.1%)으로 나타났다.

응답자 대다수는 갑질이 선진국 진입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우려했다. 응답자의 94.4%가 ‘갑질이 줄어들지 않으면 한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매우 동의한다’는 답변이 50.1%, ‘동의한다’는 답변이 44.3%였다. 갑질이 줄어들지 않을 경우 선진국 진입 시기가 얼마나 늦어질 것이라고 예상하는지 묻는 질문에는 57.5%가 ‘갑질 해결 없이는 선진국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전망했다.

갑질을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는 강력한 처벌 규정 확립(54.7%), 기업 내부 고발 제도 정립(16.5%), 정부 차원의 지속적 교육(16.1%) 등이 거론됐다. 김 교수는 “갑질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아는 게 갑질 척결의 시작”이라며 “최근 보복운전이 폭력이고 처벌 대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빈도가 줄기 시작했듯이, 갑질도 처벌 대상이라는 인식이 생기면 분위기가 바뀔 것”이라고 진단했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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