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디플레이션 세대'의 그늘

불황만 보고 자란 일본 청년들…"절약을 도의 경지로"
여행·휴대전화·외식 등 기피

아베 정부는 근심 가득…임금 올려도 소비로 연결 안돼
물가상승률, 8개월째 0%대

올해 만 20세를 맞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성인의 날’인 지난 11일 도쿄 도시마엔 놀이공원에서 열린 성인식에 참석하기 위해 걸어가고 있다. 도쿄AP연합뉴스

지난 11일은 일본 ‘성인의 날’이었다. 1995년 4월 이후에 태어나 만 20세가 된 일본 젊은이들을 위한 성인식이 일본 곳곳에서 열렸다. 정장과 기모노 차림의 일본 젊은 남녀들이 어른이 된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이들의 성인식을 바라본 일본 경제계의 시선이 밝지만은 않았다. 이들은 일본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처음으로 하락(-0.1%)한 1995년에 태어나 이후 20년간 일본 경제 불황만 보고 자란 일명 ‘디플레이션 세대’다.

일본 젊은이들이 자동차나 해외여행, 명품은 물론 옷, 휴대폰 등 생활필수품에 대해서조차 무관심할 정도로 지나치게 절제된 소비행태를 보이는 것에 일본 사회는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들에겐 ‘사토리(さとり·달관) 세대’ ‘유토리(ゆとり·여유) 세대(창의성 및 자율성 강화에 중점을 둔 유토리 교육으로 치열한 경쟁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도는 세대)’라는 말도 붙어 있다.

“휴대폰도 정장도 필요 없다”

올 성인식 대상자였던 와세다대 학생 다카하시 나나세 씨는 휴대폰이 없다. 교내 동아리 친구들이 “우리가 불편하다”며 휴대폰 구입을 권하지만 “전혀 필요없다”며 사지 않는다. 정장을 입고 참석해야 하는 이번 성인식에도 당연히 안 갔다. 일본 국제기독교대에 재학 중인 한국인 유학생 권보미 씨는 “일본 여자친구들을 보면 확실히 한국과 다른 것 같다”며 “치아교정은 고사하고 얼굴에 작은 점도 안 뺀다”고 말했다. 권씨는 “거기에 돈 들일 바에는 저축하는 게 낫다고들 한다”고 전했다.

일본에서는 기피현상을 뜻하는 ‘바나레(離れ)’를 붙여 ‘구루마(車)바나레’, ‘알코올바나레’, ‘외식바나레’ 등의 말이 있다. 젊은이들이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은 물론 술, 외식조차 하지 않으려는 것을 칭하는 말이다. 일본 내각부 소비동향조사에 따르면 29세 이하 세대주의 자동차 보급률은 작년 3월 말 49.3%로, 60세 이상 노인(62.7%)보다 낮았다. 2011년 한 해 노인층 보급률을 웃돈 후 4년째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 한 일본 자동차 전문지의 설문조사에선 도쿄도내 20~30대 독신 남성의 자동차 보급률이 20%에 불과했다.

해외 유학생도 줄어들고 있다. 사이타마대에 재학 중인 나카노 유코 씨는 “비용도 부담이고 3학년 때 유학을 가면 취업이 힘들어질 수 있다”며 “20년간 산 일본을 굳이 떠나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문부과학성에 따르면 일본인 해외 유학생은 2004년 8만3000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12년 6만명으로 감소했다.

전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인 야마오카 다쿠 씨는 2010년 《갖고 싶은 게 없는 젊은이들》이란 책에서 일본 젊은이를 ‘사토리 세대’라고 칭했다. 이 책은 “일본 젊은이들이 차를 타지 않고 브랜드 옷을 입으려 하지 않으며 스포츠도 안 한다”며 “술도 안 마시고 여행도 안 가고 담백한 연애를 한다”고 적었다.

디플레이션만 경험한 일본 젊은이
일본 젊은이들이 이처럼 덜 쓰고 보수적으로 된 것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동안 삶의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시다 히로시 도쿄대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이들 세대는 지난 20년간 지지부진한 임금상승, 낮은 직업 안정성, 활력 없는 소비만 보고 자랐다”고 말했다. 일본 가계 월평균 소득은 1996년 31만5000엔에서 지난해엔 월평균 28만9000엔으로 오히려 하락했다. 그는 “이런 경제적 상황이 부모로부터 독립해 차를 사고 결혼하며 아이를 갖고 위험을 감수하려는 마음을 빼앗아 갔다”고 설명했다.

경제 호황은 책에서나 나오는 얘기고, 일본의 ‘거품 경제’를 살아온 부모 세대의 삶은 ‘과거’라는 게 일본 젊은이들의 얘기다. 다카하시 씨는 “저축이 10만엔밖에 없으면서도 400만엔을 웃도는 수입차를 할부로 구입했다는 아버지 얘기를 듣곤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일본 젊은이들 대부분은 가능하면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하고 위험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도나 검도처럼 도(道)를 붙여 ‘디플레이션도’ ‘절약도’라는 말도 있다.

일반 국민도 자녀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긴 마찬가지다.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센터가 2014년 벌인 국제의식 조사에서 ‘자녀의 미래 생활 형편이 부모 세대보다 어떨지’란 물음에 응답자의 79%가 ‘나빠진다’고 답했다. ‘좋아질 것’이란 답변은 14%에 그쳤다.

일본 탈(脫)디플레이션에도 걸림돌

이 같은 일본 젊은이들의 생각과 생활이 디플레이션 탈피를 외치고 있는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제정책)에 부담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기업들이 실적 개선에 힘입어 임금을 올려도 이것이 소비증가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4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더 이상 디플레이션이 없는 (경제)상황에 다가섰다”고 말했다. 완전한 디플레이션 탈피는 아니라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일본은행은 소비자물가지수 2% 달성이란 목표를 위해 연간 80조엔 규모로 돈을 풀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젊은이들의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살아나지 않는 한 쉽게 디플레이션 종식을 말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작년 11월 일본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0.3% 상승하는 데 그쳤다. 작년 4월 이후 8개월째 0%대에 머물고 있다.

도쿄=서정환 특파원 ceose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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