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기 한국은 1940년에도 도시화율이 16%에 불과해 인구 대부분이 농촌에 살고 있었고 지주제가 발달해 농민의 절반이 봄이면 식량이 떨어지는 극빈 상태에 놓여 있었다(33회 참조). 그러나 이런 점만 보고 식민지 시기를 생산 증가가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해 ‘맬서스 함정’에 빠진 전통 농업사회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무엇보다 상당히 빠른 속도의 공업화와 경제성장이 진행됐다. 일본에 병합된 식민지였지만 식민지 조선 지역 안에서 1년 동안 생산된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합계해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GDP)’을 구해보면 1911년부터 1940년까지 연평균 3.6%의 속도로 성장했다. 그해 가격으로 계산한 명목 GDP는 물론 1935년 가격으로 계산한 실질 GDP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그림).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이 일어났던 세계적으로 저성장기였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경제는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이다. 더욱이 GDP 증가율(3.6%)에서 인구 증가율(1.3%)을 빼 구한 1인당 GDP 증가율도 연평균 2.3%에 달했다. 이는 인구 증가 속도보다 생산 증가 속도가 빨랐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식민지 시기의 경제가 맬서스 함정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농업비중 낮아지고 광공업 비중 높아져

산업별로 보면 광공업 부문이 빠르게 성장했다. 1911~1940년 농림어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1.5%에 불과했지만 광공업은 9.7%였고 특히 1930년대에는 13.5%에 달했다(1930~1940년). 이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산업구조에도 상당히 큰 변화가 생겼다. 1911년에는 전체 생산에서 농림어업이 67.8%를 차지했지만 1940년에는 42.0%까지 낮아진 반면 광공업(전기가스 건설업 포함) 비중은 1911년 6.7%에서 1940년 26.0%로 증가했다(그림). 1930년대 이후가 되면 단순히 농업사회라고 말하기는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왜 이런 공업화와 경제성장이 일어났을까. 어느 곳에서나 노동, 자본, 토지와 같은 생산요소의 투입이 증가하거나 기술 진보에 의해 생산성이 높아지면 생산이 증가하게 돼 있다. 식민지 시기에 토지는 별로 늘어나지 않았고 인구가 증가해 노동 투입이 증가했는데 노동자가 생산과정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자본(기계와 설비)이 더욱 빠르게 증가함으로써 같은 노동이라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이와 동시에 기술이 발달해 생산성(생산/투입)도 크게 높아졌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11~1940년의 경제성장은 기술진보에 의한 것이 36%였으며, 기계·설비와 같은 자본 투입의 증가로 인한 것이 44%였다. 식민지 시기의 경제성장은 거의 모두 기술 진보와 자본 축적에 의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이처럼 자본 투입이 증가하고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을까. 변화를 주도한 것은 총독부와 일본 자본이었다. 일본은 1905년부터 식민지 지배를 위해 화폐·금융제도와 재정제도를 정비했으며(31회 참조) 1910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다(32회 참조). 또한 일본의 민법과 상법과 같은 경제 관련 법령이 식민지 조선에 확대 적용되는 한편 총독부 주도로 철도, 도로, 항만, 전기, 통신과 같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가 이뤄졌다. 이런 제도적 물적 기반과 함께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이 일본 자본을 유인했다. 1925년 12.2%였던 초등학교 취학률이 1940년 33.8%로 높아진 것도 일본 자본이 필요로 하는 양질의 노동력 공급에 기여했을 것이다.

일본 산업자본 유입으로 급속한 공업화

1930년대에 공업화가 빠르게 전개된 것은 일본의 대륙 침략에 따라 일본제국 판도에서 차지하는 조선의 위상이 변화한 것과도 관련이 깊다. 육군대신을 네 번이나 했던 일본 군부의 실력자로서 1931~1936년 조선총독을 지낸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1930년대 초 일본제국의 경제권을 ‘일본은 정(精)공업지대, 조선은 조(粗)공업지대, 만주는 농업지대’로 재편성해 조선을 일본 본토의 정밀공업에 종속된 낮은 기술 수준의 공업지대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구상이 아니라도 1931년의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이 확대되면서 조선을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한 공업화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여기에 일본 본토에서 먼저 시작된 전시통제를 피하고자 조선으로 진출한 일본기업도 생겨났다. 1942년 현재 조선의 산업설비에 투하된 자본은 28억~30억원 정도였는데 그중 74%가 일본 산업자본이 직접 투자한 것이었다. 조선에 공장을 설립한 대표적인 일본 본토의 제조업 분야 기업은 흥남에 질소비료공장을 세운 ‘일본질소’였다. 이처럼 일본 본토로부터 자본이 유입됨으로써 급속한 속도로 공업화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 자본이 주도한 공업화와 경제성장이 한국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해방 후 일본과의 경제관계가 단절되자 공업생산이 급격히 위축된 것만 보더라도 식민지 시기의 공업화와 경제성장이 갖는 한계는 명백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에게 의미가 적은 것은 아니다. 우선 해방 후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식민지기 동안 축적된 물적 자본(철도를 비롯한 사회간접자본, 공장의 기계와 설비)은 갖고 갈 수가 없었다.

또한 일본 기업에 고용됐던 한국인은 대부분 단순 노동자였지만 전쟁으로 빠져나간 일본인을 대신해 숙련 노동자와 기술자로 성장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1930년 초 20만여명에 불과하던 노동자는 1941년 77만명으로 크게 증가했으며 그중 근대적 노동자라고 할 수 있는 공장노동자가 30만여명으로 광산, 토목, 건축 노동자 수를 능가했다.(식민지 시대 공업화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조선인 소유 기업도 빠르게 늘어

이와 함께 일본인 기업과 거래 관계를 갖는 한국인 기업들이 생겨났으며 이를 통해 ‘학습’이 이뤄지고 있었다. 더욱이 조선인이 소유한 회사와 공장이 빠르게 증가했다. 자본 규모로 보면 일본인 회사가 전체 자본금의 83.3%를 차지해 일본인 회사가 조선 경제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지만, 조선인 회사 수도 빠르게 증가해 한국인들이 새로운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1년에는 조선인 회사가 124개밖에 없었지만 1931년 781개, 1935년 1243개, 1939년 3137개로 빠른 속도로 증가했던 것이다. 조선인 공장도 급증해 1930년 전후부터는 조선인 소유 공장 수가 일본인 공장 수를 추월했다.

1938년 조선인 공장 수는 3963개로 일본인 공장 수(2627개)보다 1300여개나 더 많았다.

일본인이 주도한 공업화와 경제성장이었지만, 일본인의 것만은 아니었으며 한국인도 그로부터 자극과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