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리, 홍보팀 3년에 '기자처럼' 소개팅女에 꼬치꼬치
유과장, 인사팀 3년에 '사장처럼' 칼퇴근 동료에 핀잔도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小제목은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중 일부 글귀로 대신합니다)

“야, 너 또 왜 잔머리 굴려. 빙빙 돌려서 얘기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솔직하게!”

대기업 계열사 홍보팀장인 김 부장은 오늘도 친구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대학 동기인 친구는 그의 20~40대를 관통하는 인생사를 꿰뚫고 있다. 그런 친구가 최근 만날 때마다 ‘뜨뜻미지근하고 애매한 화법’을 지적한다. 대학 때만 해도 직설적이고 솔직한 ‘화끈남’ 스타일이었지만, 홍보 업무만 20여년째 맡으면서 언제부터인가 빙빙 돌려 말하는 습관이 생겼다. ‘리스크(위험) 줄이기’ 화법이다. 편하게 얘기해도 되는 가족은 물론 친구와도 간접 화법으로 말해 답답하단 얘기를 듣는다.

‘기자와 닮아가는’ 홍보팀

한 가지 행동을 오랜 시간 반복하면 습관이 된다.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는 직장인들은 자신의 직무가 요구하는 행동 양식이 습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오랫동안 비슷한 업무를 하다 보면 생각하는 방식까지 바뀌게 된다.

통신업체 언론홍보팀에서 3년간 일한 이 대리(남)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오랜만에 나간 소개팅 자리.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며 상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1시간 남짓 지났을까. 상대방의 표정이 서서히 어두워지더니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결국 날아온 뼈아픈 두 마디. “왜 이렇게 간을 보세요? 지금 누구 심문하세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최근 들어 가족들로부터 “갈수록 까칠해진다”는 비난도 들었던 터다.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공격적으로 질문공세를 퍼붓는 기자들과 대화를 많이 하다 보니 어느새 ‘닮은꼴’이 돼버린 것이다.

‘경영자 마인드’ 가진 인사팀

“걔는 맨날 칼퇴근에 옷도 제멋대로 입고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대기업 인사팀에서 일하는 유 과장은 어느 날 가족들과 식사 도중 같은 팀 동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유 과장의 형은 인사팀 근무 3년 만에 완전히 변해버린 동생이 놀랍다. 학창시절 나름 ‘반항아’였던 유 과장이 ‘충성스러운 조직원’으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인사 업무 가운데 평가와 보상을 맡고 있는 유 과장의 회사에 대한 주인 의식은 남다르다. 직원들을 평가하고 연봉을 책정하면서 싹트기 시작했다. 경영자로부터 양도받은 권한이지만 계속 행사하다 보니 ‘경영자 마인드’를 갖게 됐다. 노동조합과 연봉협상을 할 때도 ‘연봉을 올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실적이 저조한데 인건비만 오르면 수익성 악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경영진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인 보고 체계가 확고하게 자리잡힌 인사팀의 보수적인 조직 문화 때문인지 생각도 보수적으로 바뀌었다. 마케팅 등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는 동기들이 청바지 차림으로 출근하면 가서 한마디 해주고 싶다. 단정하고 깔끔한 슈트 차림의 복장과 용모는 대기업 사원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단 하나의 꿈, 임원” 전략기획팀
대기업 계열사 전략기획팀에서 근무하는 박 차장도 마찬가지다. 경영자와 가장 가까운 부서에서 미래 전략을 짜는 ‘회사의 브레인’이란 자부심이 대단하다. 전략기획팀은 사내에서 야근이 가장 많은 팀 중 하나. 그러나 매일 밥 먹듯이 야근을 해도 힘들지 않다. 피와 땀을 쏟아부은 만큼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박 차장의 꿈은 단 하나. 확고하다. 끝까지 살아남아 경영진, 곧 임원이 되는 것. 젊은 날의 열정을 모조리 쏟아부은 회사에서 최대한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게 그의 목표다.

“회사가 전부는 아니잖아~” 마케팅팀

같은 회사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이 과장은 박 차장과 생각이 다르다. 그가 보기에 박 차장은 ‘우물 안 개구리’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실적과 승진에 목숨 걸며 한 회사에만 올인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마케팅팀은 외근이 많다. 회사 밖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도 잦다. 그가 세상이 넓다고 생각하게 된 배경이다. 이 과장의 꿈은 임원이 아니다.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다른 꿈을 펼치고 싶다.

이런 자신감과 자유로운 마인드는 마케팅팀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마케팅팀은 입사 때 가장 경쟁률이 높았다. 그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팀에 합류했다. 광고대행사 등을 대하는 일이 많다 보니 사내 다른 부서에 비해 ‘갑’의 기분을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다. 팀 분위기도 보수적이고 수직적이기보다 자유롭고 수평적인 편이다.

“엑셀과 파워포인트는 나의 정체성”

10여년째 통신업체 영업부서에서 근무해온 장 과장의 머릿속은 온통 엑셀로 가득하다. 오늘 제품 몇 개를 팔았는지 입력하면 몇 달 후 매출, 이익은 물론 영업을 강화해야 하는 지역, 타깃 마케팅 대상까지 한꺼번에 계산해 출력해주는 잘 짜 놓은 엑셀 양식은 몇 대째 이어오는 ‘곰탕집 레시피’만큼 소중하다.

엑셀은 그의 일상도 점령했다. 일기장도 가계부도 모두 엑셀로 작성한다. 휴가를 떠날 때도 엑셀을 이용해 날짜·시간대별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다. 함께 골프 라운딩을 나간 다른 팀 동기는 그가 골프 코스 공략법까지 엑셀로 만들어 A4용지 한 페이지로 깔끔하게 정리해온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같은 회사 전략기획팀에서 일하는 차 과장은 파워포인트와 동고동락한다. 근무 시간의 90%를 파워포인트 발표 자료를 만드는 데 쓴다. 현란한 그래픽과 화려한 도표를 이용해 ‘잘 그린’ 자료를 제출해야 결재 사인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파워포인트로 구글맵에 버금가는 지도도 그릴 수 있어 전공이 미술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다. 그의 화법은 간략한 두괄식이다. 10여년간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들며 밴 습관이다.

전설리/황정수 기자 slj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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