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어떻게 선대의 유산만을 팔아먹고 사는 탕아(蕩兒)로 그칠 수 있나. 우리 스스로 유산을 창작해야지. 고려청자 조선백자, 그 속에 깃든 장인정신을 배워 전 세계에 들춰 보여줘야 해.”

한지와 수묵 등 동양화 매체를 사용, 스스로 ‘서예적 추상’이라고 이름붙인 독창적 예술 세계를 창조한 고암(顧菴) 이응로 화백. 1904년 1월12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집안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가의 꿈을 키워가던 그는 19세 때 상경, 당시 서화계의 거장이던 해강 김규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다.

1년 만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했다. 정식 화가는 됐지만 돈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10년 가까이 극장 간판을 그렸다. 그러던 중 서른을 넘긴 나이에 일본 유학을 떠나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1945년 귀국해 단구미술원을 세우고, 3년 뒤엔 홍익대 주임교수가 돼 후진 양성에 나섰다. 그로부터 10년, 한국 화단이 좁았을까. 54세 때 프랑스로 건너갔다. 2년 만에 대화랑 폴 파케티와 전속계약을 맺고, 첫 개인전을 열었다.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세우고 1965년엔 상파울루비엔날레에서 명예대상을 받았다.

시련도 이어졌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1983년 프랑스 국적을 얻어 고국과의 공식 인연을 끊었다. 1989년 서울에서 그의 대표작 ‘인간 군상’ 시리즈로 초대전이 기획됐다. 하지만 입국은 불허됐고, 전시회 첫날 파리 작업실에서 쓰러져 이튿날 별세했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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