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 세계명문가의 위대한 유산

최효찬 < 연세대 연구원·자녀경영연구소장 >

두 살 때 어머니,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읜 소년이 있었다. 형과 함께 졸지에 고아가 된 소년은 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마저 소년과 함께 산 지 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언제나 쾌활하고 재미있는 아이였던 소년은 웃음을 잃어버렸고 내성적이고 고독한 아이로 변해갔다.

청교도인 할머니는 급진적인 자유주의자였다. 종교를 강요하는 공교육에 반발해 손자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교사에 의해 키웠다. 친구가 없어 외로운 시절을 보냈던 소년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였다. 소년은 18세 때 케임브리지대에 들어간 후에야 친구들과 어울리며 토론하고 대화하는 것을 익힐 수 있었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4년 동안 화이트헤드,톰슨,케인스,마셜 같은 친구를 사귀었다. 이들은 이후 철학과 과학,경제계에서 세계적인 거장이 됐다. 물론 이 청년도 거인이 됐다.

그는 우리에게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으로 익숙한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이다. 러셀 가는 헨리 8세 이래 베드퍼드 공작을 시작으로 영국 총리를 두 번 지내고 선거법 개정을 주도한 존 러셀 백작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대표적인 귀족 가문이다.

러셀이 유명한 것은 단순히 귀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세계적인 철학자이자 수학자,노벨문학상 수상자일 뿐만 아니라 반전반핵운동을 주도하고 평화운동을 펼치며 89세 때 투옥되는 등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로 평생 살았기 때문이다.

흔히 명문가란 지배계급을 대표하기에 보수적인 가문으로 통한다. 하지만 러셀 가문은 급진적이고 자유적인 가풍을 500여년이나 이어오고 있다. 러셀 가문은 헨리 8세 때 외교관을 지낸 존 러셀이 백작에 임명되면서 귀족가문에 올라섰다. 스튜어트 왕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된 윌리엄 러셀에 이어 할아버지인 존 러셀은 총리를 두 번이나 지낸 자유주의적 정치가였다. 그의 부친은 《자유론》으로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의 제자였다.

러셀의 성장 배경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성적(性的) 진보주의자로도 유명하다. 인습을 타파하는 행동과 사상으로 '광인'이란 비아냥거림을 들을 정도였다. '혼외정사'와 '계약결혼'을 주장한 이도 바로 러셀이다.

그는 《결혼과 도덕》이라는 책에서 "간통은 이혼 사유가 될 수 없다. 결혼 후에도 임신을 하지 않는다면 배우자 이외의 이성과 연애할 자유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 자신도 부인의 외도를 허용했는데,부인 도라가 외도로 임신하는 바람에 이혼하는 등 불행을 겪었다. 그는 모두 네 번 결혼했다.

그의 삶의 이력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게 있다. 바로 대안학교인 '비콘힐 스쿨(Beacon Hill School)'을 55세 때인 1927년 설립했다는 사실이다. 러셀이 학교를 세우게 된 이유는 종교를 강요하는 공교육에 대한 반발과 함께 자신이 어린 시절 학교에 가지 못하고 혼자서 자란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가 쓴 《행복의 정복》의 탄생 과정이 흥미롭다. 이 책은 '비콘힐 스쿨'이 운영미숙으로 재정난에 빠지자 이를 덜기 위해 쓴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학교의 재정난을 덜게 됐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또 다른 책은 무신론자인 아버지의 영향과 자유주의적 가풍에서 나왔다. 이러고 보면 '가풍'은 케케묵은 게 아니다.

최효찬 < 연세대 연구원·자녀경영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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