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10일 서울 명동성당 옆 천주교 서울 대교구청에 있는 정진석 추기경의 집무실로 80대 할머니가 방문했다. 둘째딸 홍기명 씨(55)와 동행한 한재순 할머니(세례명 미카엘라 · 사진)였다.

할머니는 정 추기경에게 1억원짜리 수표 9장을 내놓으며 "저는 죄인입니다. 이 세상에 나와서 잘한 일이 없습니다. 좋은 데 써주세요"라고 했다. 이어 정 추기경에게 쪽지를 내밀며 "이곳을 위해서도 써주세요"라고 했다. 쪽지에는 '옹기장학회'라고 적혀 있었다. 옹기장학회는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설립한 장학재단이다.

할머니는 닷새 뒤 한 수도원에 1억원을 내놓았다. 할머니의 통장에는 280만원만 남았다. 남편과 함께 채소 장사,쌀 장사를 하며 다섯 남매를 키운 할머니는 평생을 절약하며 빠듯하게 살았다. 한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고,해진 내의는 깁고 또 기워 입었다. 10억원은 이렇게 평생 모은 돈이었다.

할머니는 그러나 정 추기경을 찾아가면서 동행한 둘째딸 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자식들은 물론 여동생에게도,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모든 짐을 내려놓고 필생의 '숙제'를 다했다는 안도감이었을까. 홍씨에 따르면 할머니는 기부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도중에 요양원에 있던 남편 홍용희 씨(세례명 비오)를 찾아가서는 남편의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날 밤 딸이 "자신을 위해서는 고기 한 근도 안 사 먹으면서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내놓을 수 있었어?"라고 묻자 할머니는 "먹고 싶은 거 다 먹고,쓰고 싶은 거 다 쓰고,하고 싶은 거 다 하면 하느님 앞에 뭘 가져 가겠느냐"고 대답했다.
할머니가 정 추기경에게 털어놓은 사연도 특별하다. 친정아버지 생전에 효도를 다하지 못해 늘 마음이 아팠다는 할머니는 어느 날 평화방송에서 정 추기경을 보고 친정아버지와 너무나 닮아 꼭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정 추기경을 만난 할머니는 친정아버지에게 용돈을 드리는 마음으로 교회의 사업과 청소년 교육을 위해 써달라며 전 재산을 서울 대교구에 기부했다는 것이다.

근검절약하며 서로 아끼던 부부는 지난달 차례로 세상을 떴다. 남편 홍씨가 향년 82세로 지난달 26일 별세한 데 이어 건강했던 할머니도 뇌출혈로 쓰러져 이틀 뒤인 28일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장례 미사는 지난달 30일 서울 대치동성당에서 봉헌됐다.

정 추기경은 추도사에서 "두 분은 재물이 아니라 평생의 삶을 기부하고 떠나셨다"고 애도했다.

정 추기경은 "그 돈은 미카엘라 자매님과 비오 형제님이 평생 근검절약하며 모은 재산이었다"며 "그것은 단순히 재물이 아니라 부부 평생의 삶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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