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패로 끝난 낭만적 사회주의…개혁의 불씨로

19세기 비인간적 자본주의 맞서 英·美에 박애주의 공동체 건설
개혁 실패했지만 노동운동에 영향

초기 공장의 노동 조건은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19세기의 급진적인 잡지 '라이언'에는 극빈 가정 출신 소년소녀 노동자들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이들은 꿀꿀이죽을 먹기 위해 여물통에서 돼지들과 함께 뒹굴었다. 그들은 발길질과 주먹질,성폭력에 시달렸다. 고용주인 앨리스 니덤은 아이들의 귀를 못으로 뚫는 소름 끼치는 버릇을 가졌다….아이들은 겨울 추위 속에서도 거의 벌거벗은 상태로 지냈고,십장의 가학증에 시달린 듯 모두 이가 부러져 있었다. '

급기야 적개심에 불타는 노동자들이 공장을 급습해 기계를 파괴하는 소위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 영국 전역에 걸쳐 일어났다. 노동자들의 소요는 귀족과 중산층에 두려움을 자아냈다. 시인 로버트 사우디는 "부자에 대한 가난한 자들의 봉기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오직 군대뿐"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노동자들을 강압적으로 누르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까.

자본가와 노동자 간 평화로운 공존의 길을 모색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로버트 오언(Robert Owen · 1771~1858)이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인근 뉴래너크라는 산골에 이상적인 작은 공동체를 건설했다. 방이 둘씩 딸린 노동자 가옥이 반듯하게 줄지어 서 있는 마을은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아이들은 공장 노동에 시달리는 대신 학교에서 공부하며 즐겁게 지냈다. 면직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강압적인 규율 없이도 열심히 일했다. 놀라운 일은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면서도 이곳이 막대한 이윤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이런 기적을 만들어낸 오언은 1771년 웨일스에서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홉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아마포 상인의 도제로 일한 인물이었다. 출중한 사업 능력을 발휘한 그는 18세에 이미 기계 제작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다음에는 한 방적공장의 공장장으로 취직해 승승장구했다.

뉴래너크라는 산골의 공장 하나가 매물로 나왔을 때 그는 자본이 부족한 상태였지만 과감하게 소유주와 담판을 지어 공장을 얻는 동시에 소유주의 딸까지 신부로 맞았다. 그러고는 1년 안에 이곳을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로 변모시켜 세계적인 명소로 만든 것이다. 방명록에 이름을 남긴 2만명 중에는 러시아의 차르가 될 니콜라이 대공이라든지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황자 같은 거물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오언은 단지 작은 사업체 하나를 모범적으로 운영하는 정도를 넘어 인류 전체를 개선한다는 대담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뉴래너크는 그 사상의 시험 장소에 불과했다.

그의 사상을 널리 퍼뜨릴 기회가 찾아온 것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대불황기였다. 폭동이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상황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고자 하는 위원회는 박애주의자 오언의 고견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뜻밖에도 '협동마을(Village of cooperation)' 건설 계획안이었다. 800~1200명이 농장과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자급자족 단위를 전국적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기대하지 않았던 위원회는 당황해 그의 제안을 공손히 거부했다.

오언은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의회에 자기 계획을 설명하는 소책자를 뿌리고,실험적인 협동마을 건설에 필요한 모금 운동을 했다. 돌아온 대답은 '거지 공동체'를 만들려고 한다는 투의 싸늘한 말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행동으로 옮겨 실증해 보이기로 맘먹었다. 자신의 뉴래너크 지분을 판 돈으로 미국에 공동체를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그가 선택한 곳은 인디애나주의 워배시 강가에 있는 3만에이커의 땅이었다. 1826년 7월4일,그는 사적 소유,비합리적 종교,혼인제도로부터의 독립을 내용으로 하는 '정신의 독립선언'을 한 뒤 '뉴하모니'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건설했다. 곧 800명의 이주민이 몰려왔다.

그렇지만 이는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실험이었다. 그에게는 고상한 이상만 있었지,그것을 실현할 꼼꼼한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2년도 채 안 돼 이 공동체 실험은 실패로 끝났고,그는 전 재산의 80%를 잃었다. 다시 시도해 보기 위해 미국의 잭슨 대통령과 멕시코의 산타아나 대통령을 만났지만,이들 모두 오언의 위대한 뜻에 공감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자애로운 오언 씨'로 불렸지만,그의 협동마을 구상은 조롱거리가 됐다. 그래도 그의 생각에 동조하던 사람들이 없지 않아 노동계급 일부에서 그의 가르침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원용하기 시작했다. 화폐제 폐지와 같은 너무 급진적인 주장을 다소 온건하게 전환해 생산자협동조합과 소비자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이 조합들도 대부분 파산으로 끝났지만,그 가운데 '로치데일 선구자들'이라는 이름의 소비자협동조합은 살아남아 후일 영국 노동당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끝까지 낭만적 이상주의자로 남았다. 말년에도 거대한 도덕 십자군 운동을 구상했다. '그랜드 내셔널'이라 불린 이 조직에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모여들었고,이것이 영국 노동계급 운동의 선구자가 됐다. 전국 차원의 이 조합은 말하자면 산별노조의 선구였다. 오언은 흥에 겨워 전국 유세를 돌았지만 이 운동 역시 2년 안에 무너졌다.

오언과 같이 낭만적인 방식으로 당대의 심각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가 구상했던 기상천외한 사업들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사회를 바꾸려는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해 보았다는 것이고,이런 것이 후일에 싹을 틔웠다는 것이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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