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 깊은 안흥항 바다, 백제시대부터 항구로
세곡 운송선 잦은 침몰로, 죽도ㆍ마도에 유물 남겨
미소 머금은 마애삼존불상, 뱃사람 같은 경건함 엿보여

태안읍으로 들어서자 태안읍의 랜드마크인 백화산(284m)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애삼존불상(국보 제307호)이 계시는 백화산으로 오르기 전,중국 사신이 쉬어가는 정자였던 경이정에 잠시 머문다. '사신의 평안함을 빈다'라는 뜻을 가진 경이정은 정 · 측면 3칸의 우물마루로 이뤄진 건물이다.

마애삼존불상과 천년 고찰을 품은 백화산

중국 사신이 아닌 나는 마루에 앉지 못하고 태안현의 동헌이었던 목애당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앞면 6칸 · 옆면 3칸의 목애당은 오랫동안 태안군청의 민원실로 쓰였던 건물이다.

태안초등학교 부근의 향교를 거쳐 마애삼존불입상으로 가는 산길로 접어든다. 교장바위 백조바위 등 기암괴석을 지나 마애삼존불상이 있는 태을암에 이른다. 보호각 안으로 들어서자 부채꼴 바위를 파서 만든 감실 속에 새겨진 삼존마애불상이 천년의 고요를 머금고 서 계신다.

삼존불은 중앙에 본존불,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 삼존불상은 중앙에 보살,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특이한 형식이다. 중앙의 보살은 조금 여성스럽지만 좌우의 불상은 굳센 의지가 엿보이는 강인한 얼굴에 체구도 당당하다. 바닷바람과 싸우는 바닷가 사람들의 원을 들어주는 부처라면 저만큼 강건해야 하리라.

백화산 정상을 향해 다시 산을 오른다. 산 정상에는 고려 충렬왕 13년(1286년)에 쌓았다는 백화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사방이 절벽이라 적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다. 성안 높은 곳에는 온전한 형태의 봉수대가 남아 있다. '동으로는 서산군 북산,남으로는 서산군의 도비산과 호응했던'(동국여지승람) 봉수대다. 저 아래 태안읍의 크고 작은 집들이 모두 백화산이 낳은 자식들 같다.

도량이 넓은 소나무들이 모여사는 흥주사 뒷숲

산에서 내려와 탑골에 있는 고려 후기 5층 석탑을 일별한 후 백화산 동남쪽 기슭에 있는 상옥리 흥주사로 향한다. 절로 오르는 계단 옆에는 한 노승이 꽂아둔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웅대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절 이름도 은행나무처럼 번창하라고 흥주사라 했다. 이 지방 사람들의 신앙적 대상이기도 했던 은행나무는 900년이라는 수령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성성하다.

앞면 3칸 · 옆면 3칸 크기의 맞배지붕 누각인 만세루가 나그네를 맞는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이 무기저장고로도 썼다는 건물이다. 절 마당과 이어진 만세루 마루에서 밖을 내다본다. 은행나무가 시야를 독점한다. 은행나무여,흥주사에 행사하는 네 지분을 줄여줄 순 없겠니.절 마당에는 사라진 몸돌 대신 독특한 모양의 돌을 올려놓은 삼층석탑이 서 있다. 그럴듯하게 현대적 조형미를 갖춘 '퓨전 석탑'이다. 흥주사 뒷숲에는 키 큰 적송들이 모여 산다. 비록 비좁고 빽빽하게 서 있지만 남에게 기꺼이 틈을 내줄 줄 아는 녀석들이다.

역사적 공간과 삶의 공간이 병존하는 안흥항

정죽반도의 끝에 있는 안흥항과 신진도로 향한다. 가는 길목에서 코딱지만한 항구 채석포항을 만난다. 출항을 앞둔 꽃게 주꾸미잡이 배들이 그물 손질에 여념이 없다. 포구 앞에 우뚝 선 바위가 내 마음의 금선(琴線)을 건드린다. 이곳에서 그만 오늘 하루의 여정에 종지부를 찍고 싶구나.

백사장 끝에 작은 포구를 부록처럼 단 연포해수욕장을 지나 근흥면 정죽리 해안가의 안흥성에 닿는다. 조선시대에 쌓은 안흥성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약 1500m의 성벽을 10년간에 걸쳐 쌓았다 하니 백성들의 고초가 얼마나 컸으랴.

'복원'한 서문 수홍루의 옆길을 따라 성으로 들어간다. 태국사와 북문을 지나 성을 가로질러 남문으로 간다. 내려다보이는 정죽4리 마을의 집들이 요람에 잠든 아이들 같다. 서해와 안흥항이 내려다보이는 남문에 닿는다. '복원'이라는 보톡스를 맞지 않은 채 세월의 주름살을 오롯이 간직한 성돌이 깊이 있다.

안흥항 앞바다로 고개를 돌리자 두 개의 섬이 눈에 들어온다. 뒤쪽에 있는 섬이 2007년 어부의 주꾸미 통발에 걸려 고려청자가 올라온 것을 계기로 목간 청자 등 2만3000점을 인양했던 죽도다. 예부터 이곳 안면도 · 태안반도 일대의 안흥량은 삼남지방의 세곡을 운송하는 조운선들의 침몰이 잇따랐을 만큼 뱃길이 험한 바다였다.

조선 태조에서 세조에 이르는 60년간에만 200여척의 선박이 부서지거나 침몰해 1200여명이 숨지고 1만5800섬의 쌀이 수장됐다. 순조로운 항해를 기원하고자 본래의 지명인 난행량(難行梁)을 안흥량으로 고치고 고려 인종 때부터 조선 태종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운하 굴착을 시도했지만 암반들에 봉착해 중단해야 했다. 안흥량 뱃길은 죽도 앞바다 등 여러 곳에 해저유물을 떨어뜨렸다. 가히 새옹지마라 할 만하다.

백제시대 이래 유서 깊은 항구인 안흥항으로 내려간다. 안흥항은 신진도에 외항이 생긴 후로 어선보다 낚싯배와 유람선이 주로 출입하는 한가한 항구가 됐다. 주민도 고작 160명뿐이다.

안흥항 앞바다는 물이 맑고 수심이 깊어 우럭의 서식지로 알맞은 곳이다. 우럭 낚시에 좋은 철은 산란을 앞둔 5~7월이다. 유람선 선착장에 서자 건너편 신진도 후망산 아래 한창 공사 중인 고선박 경화처리시설과 보존처리장이 건너다보인다. 앞으로 신진도 일대는 이미 지어진 탈염처리장과 더불어 해저유물 발굴과 보존의 본산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한 마리 물고기처럼 파닥이는 활기찬 '새나루터'

1995년 개통한 신진대교를 건너 신진도로 간다. 다리 위에 서서 안흥항과 신진도 사이를 흐르는 좁은 물길을 바라본다. 먼 옛날엔 신진도와 안흥이 한덩어리였다는 얘기가 도무지 실감나지 않는다. 후망봉을 배후에 두고 좌우에 부억도와 마도를 거느린 신진도는 활기찬 곳이다. 고려 성종 때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다는 신진도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8년 안흥항이 1종 국가어항으로 지정되면서부터다. 부둣가에선 출항을 앞둔 꽃게잡이 어선들이 크레인으로 그물을 낚아(?) 배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방파제를 따라 마도로 간다. 이 방파제공사 과정에서 동물 화석과 토기 등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다수 발견됐다고 한다. 앞바다에선 몇 년째 해저유물 인양작업을 계속 벌이고 있으니 마도는 영락없는 '보물섬'이다. 마도 해안가를 돌아보고 신진도로 되돌아온다. 수협 위판장과 어물전을 지나 방파제 끝에 이른다. 방파제 아래에선 낚시꾼들이 갯낚시에 한창이다.

저만치 가의도가 마치 푸른색 바다 쟁반 위에서 누에처럼 꿈틀거리고 있다. 저 가의도 지나 서해 끝까지 가면 작은 섬들이 새들처럼 줄지어 날아가는 듯한 격렬비열도에 닿을 것이다. 서해의 최극단 격렬비열도에 가고 싶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또다시 발길을 돌린다. 난 너무 오랫동안 일상의 안이함에 빠져 극단 혹은 극한을 추구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행로를 스스로 제약하는 여행자는 얼마나 형편없고 질 낮은 여행자인가.

안병기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

●쌀뜨물에 우럭포 넣은 시원한 우럭젓국 한숟갈…갯완두 등 희귀식물 자라는 신두리 해안사구도 볼만

맛집

'쌀 한 톨 앞에 무릎을 꿇다/ 고마움을 통해 인생이 부유해진다는/ 아버님의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쌀 한 톨 안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해질녘/ 어깨에 삽을 걸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정호승 시 '쌀 한 톨' 전문)

태안읍 남문리 태안등기소 건너편에 있는 토담집(041-674-456)은 간장게장과 우럭젓국으로 유명한 집이다. 봄에 잡은 알이 꽉 찬 게로 담은 간장게장도 맛있지만 3~4일간 꾸덕꾸덕 말린 우럭포를 쌀뜨물에 넣고 끓인 우럭젓국은 북엇국 이상으로 시원하다. 넉넉하게 든 두부도 고소하고 우럭도 적당히 부드러워 씹는 맛이 좋다. 꽃게장 2만1000원,우럭젓국 9000원.

여행정보

안흥항과 신진도에서는 태안 해안국립공원의 섬들과 해상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관광 유람선을 탈 수 있다. 유람선을 타고 천혜 비경을 바라보며 세찬 바닷바람에 버리지 못하고 여행지까지 가져온 시름을 날려버리는 것도 여행의 묘미다. 안흥항(21세기관광유람선 041-675-5220)과 신진도(안흥유람선 041-674-1603) 두 군데서 운항한다. 안흥항에서 출항하는 유람선의 코스가 조금 길고 볼 것이 많지만 승선 인원이 더디게 차는 어려움이 있으니 잘 고려할 일이다.

A코스(60분 소요)=신진도→부억도→가의도→돛대바위→독립문바위→사자바위→거북바위→코바위→촛대바위→여자바위→신진도.B코스(90분 소요)=신진도→부억도→목개도→정족도→가의도→돛대바위→독립문바위→사자바위→거북바위→신진도.C코스(120분 소요)=신진도→부억도→가의도→돛대바위→독립문바위→사자바위→거북바위→코바위→촛대바위→여자바위-신진도.승선료는 A코스 1만원,B코스 1만3000원,C코스 1만7000원.

시간 여유가 있다면 원북면 신두리의 신두리 해안사구(천연기념물 제431호)를 둘러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통보리사초 갯완두 등 희귀식물들과 표범장지뱀 종다리 등 희귀 동물이 서식하는 곳이다. 바람 자국 등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드문 경관을 볼 수 있다. 태안읍 남문교차로에서 우회전→남면사거리에서 좌회전→원북→이원 방향 603번 지방도로→반계삼거리에서 좌회전 634번→신두리해수욕장.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