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1903년 중국 상하이 덕화은행에 51만 마르크의 '내탕금(內帑金)'을 맡겼다. 일종의 비자금이다. 당시 대한제국 총세입의 1.5%에 해당하는 액수였다고 한다. 6년 후 고종으로부터 자금 인출 밀명을 받은 이는 뜻밖에도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였다. 고종에게만 돈을 내준다는 덕화은행장의 확인서와 고종의 위임장,주중 독일공사의 인증서,예치금 영수증 등을 제출했으나 그 돈은 이미 일본이 가져간 뒤였다. (김동진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

헐버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변호사를 고용해 통감부 초대 외무총장 나베시마가 쓴 인출금 영수증을 확인하고 관련 서류들을 모아 진술서를 만든 다음 미국 의회에 제출하는 등 돈을 돌려받으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여든이 넘어서도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출경위를 추적한 보고서와 관련 서류 일체를 보냈을 정도다. '내탕금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내가 고종 황제의 수임권자로서 돈을 받게 되면 즉시 그 돈을 한국에 돌려줄 것이니 알아서 처분하십시오.'(1948년 이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헐버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건 1886년 7월이다. 첫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한 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독립신문 창간을 도운 것은 물론 을사늑약 후 고종의 밀서를 갖고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 면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07년 이준 열사보다 먼저 헤이그에 도착해 만국평화회의시보에 한국 대표단의 호소문을 싣게 한 것도 헐버트다.

1889년엔 각국의 지리 정치 등을 한글로 소개한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도 만들었다. 특히 1895년 발표한 한글 로마자표기법의 상당 부분은 지금까지 사용할 만큼 선진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09년 일제에 쫓겨 미국으로 갔던 헐버트는 87세 되던 1949년 40년 만에 다시 한국땅을 밟았다. 노구에 긴 항해로 건강이 악화된 탓에 입국 1주일 후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말했던 대로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잠들었다.

564돌 한글날(9일)을 앞두고 헐버트의 한글존중 정신과 독립운동을 기리는 학술대회가 5일 서울YMCA 강당에서 열린다.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했던 그의 업적을 되새기고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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