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출 배경은
"유럽 각국 간 세력균형에 초점을 맞추다 미국과 중국의 독주를 막기엔 역부족인 약체 지도자가 선출됐다. "(파이낸셜타임스)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오랫동안 유럽 외교의 기본틀로 자리 잡았던 '세력균형' 정책이 21세기 '유럽합중국'의 첫 대표를 뽑는 자리에서도 결정적인 힘을 발휘했다. EU의 정치 통합을 목표로 삼은 리스본조약 발효(12월1일)에 발맞춰 'EU 대통령(정상회의 상임의장)'과 'EU 외교장관(외교 · 안보정책 고위대표)'을 선출하기 위해 19일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특별정상회의의 핵심 키워드는 여전히 '세력균형'이었다.

헤르만 반 롬푸이 벨기에 총리를 초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으로 선출한 것은 유럽 내 강대국과 약소국,좌파와 우파를 모두 만족시키는 절묘한 절충안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반면 미국과 중국에 맞서 EU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에는 지나치게 '무명'의 힘없는 인물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EU 상임의장은 매년 4회 이상 열리는 EU 정상회의를 주재하고 EU를 대외적으로 대표한다. 하지만 군사 · 외교 문제 등에서 실질적 권한은 없어 상징적 대표로 평가된다.


긴 샅바싸움…전격적인 최종 선택

당초 이번 정상회의가 EU 상임의장을 뽑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과 달리 예상보다 빨리 롬푸이 총리를 초대 상임의장으로 선출한 것에 대해 독일 주간 슈피겔은 "리스본조약 비준에 몇 년이 소요됐고,EU 상임의장 후보 선정에도 각국이 수주일간 의견을 좁히지 못했지만 일단 균형점을 찾자 최종 결정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진행됐다"고 평가했다.

앞서 정상회의 시작 전까지 EU 27개국 정상들은 리스본조약으로 신설된 두 자리를 채우는 데 정치 성향과 성별,강대국과 약소국 안배라는 고차 방정식을 푸느라 사전합의를 보지 못했다. 초대 상임의장으로 유력했던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유럽 대륙의 대주주인 프랑스와 독일의 반대로 사실상 낙마한 뒤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실타래가 엉킨 것이다. 결국 EU 상임의장은 소국인 벨기에에,외교대표는 강대국이자 상임의장 자리를 놓쳐 체면을 구긴 영국에 안배하는 타협안이 선택됐다. 여기엔 지정학적 요소와 유럽 각국의 인구 분포까지 고려됐다.

영국 BBC방송은 "균형 추구가 회의의 모든 것이었다"고 전했고,독일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은 "소국이자 남성 우파 정치인인 롬푸이를 의장에, 대국 출신으로 좌파 여성 정치인인 애슈턴을 외교 · 안보 대표로 삼아 각국의 요구를 골고루 반영했다"고 분석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EU 27개 회원국 중 인구가 1700만명이 넘는 국가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 7개국에 불과하다"며 "강대국들에 의해 세력균형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한 작은 국가들이 소국 출신 EU 대표를 탄생시켰다"고 설명했다.

◆국제무대 독자 목소리 낼지는 미지수

그러나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반 롬푸이-애슈턴 조합'이 냉혹한 국제무대에서 유럽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을지엔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두 사람 모두 그동안 유럽 정치무대에서 사실상 무명으로 주요 문제를 다뤄본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이다.

롬푸이 총리는 벨기에 총리로 취임한 지 불과 11개월밖에 되지 않아 "아직 적을 만들 시간도 없었다"는 평을 받고 있고,애슈턴 외교대표는 영국 내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FT는 "과거 미국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유럽과 얘기하려면 도대체 누구와 통화해야 되나'라며 유럽의 분열상을 꼬집었지만 약체 상임의장 선출로 리스본조약 발효 후에도 여전히 키신저의 질문에 답할 수 없게 됐다"고 덧붙였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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