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의 역사성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수도 서울의 중심이 시청 앞 서울광장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광장이 언제,어떻게 그런 모양새가 됐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광장을 만들고 있는 것은 이곳의 도로망이다. 6거리 곧 방사상 도로 체계는 서울에서 이곳 외에 다른데선 찾아 볼 수 없다.

이 도로 체계는 19세기 중반 파리의 개선문 일대에서 처음 등장해 미국 워싱턴 DC로 건너가면서 서양의 큰 도시들이 다투어 도입한 것이다. 서울광장의 6거리 체계도 정연한 형태는 아니지만 외형상 이에 속한다.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 준 것으로 알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1887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과 그 수행원들은 청국의 방해를 뚫고 워싱턴 DC에 입성했다. 1882년 4월에 이미 한 · 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지만 청국이 종주국을 자처하면서 조선의 공사 파견을 방해했다. 일행 중 번역관으로 참가한 이채연은 워싱턴 DC의 도시적 특징과 도시 행정을 공부했다. 또 일행 가운데는 월남 이상재도 있었다. 이들이 귀국해 1896년 9월부터 서울 도시개조사업을 폈다. 당시 박정양은 총리대신 겸 내부대신,이상재는 내부 토목국장,이채연은 한성판윤이 돼 이 일을 추진했다.

서울의 궁궐과 종묘는 모두 북쪽 산 아래에 배치돼 있다. 군주는 남쪽을 바라보면서 백성을 다스린다는 설을 따른 것이다. 유일하게 덕수궁만은 도심 가운데로 나와 있다. 이 궁은 1896년 2월에 고종이 일본군이 감시하는 경복궁을 빠져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에서 앞으로 환궁하여 쓸 곳으로 새로 지은 것이다. 경운궁(慶運宮)이 본명이다. 이 궁의 신축은 서울 도시개조사업과 함께 진행되었다. 새 궁이 지어지고 있을 때 주위의 도로 체계를 바꾸는 작업도 진행됐다. 소공로 같은 것은 넓히고,서소문로와 태평로는 새로 내서 방사상 체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워싱턴 DC에서 방사상 도로 체계의 구심점이 되는 곳은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두 곳이다. 서울의 방사상 도로의 구심점에 새로 지어진 경운궁은 곧 워싱턴 DC의 대통령궁(백악관)에 해당한다. 경운궁 내 서양식 건물 가운데 가장 크게 지은 석조전은 미국 백악관과 모양이 닮았다. 트루먼 대통령 때 건물 정면에 둥근 발코니를 새로 붙이기 전까지 그 건물의 외양은 서울의 석조전과 비슷했다.


박정양은 '워싱턴기'라는 글에서 이곳의 도시적 특징으로 도로 체계를 비롯해 기념물,공원,조각상 등을 자세하게 언급했다. 서울에도 기념물로 독립문이 세워지고 그 곁에 독립공원이 만들어졌다. 이어 원각사 자리를 정비해 탑골공원을 만들었다. 종로,남대문로 등 간선도로는 가가(假家)들을 철거해 도로를 확장한 뒤 철궤를 시설해 전차를 달리게 했다. 1899년 5월에 개통한 서울 전차는 도쿄보다 3년이 앞섰다. 개조 사업을 주관한 한성전기회사는 고종 황제와 미국계 콜브란-보스트윅사가 반씩 출자해 만든 회사로서 서울시장이 사장을 겸했다.

당시 ?~독립신문??은 이 모든 변화를 보도하면서 정부를 극찬했다. 1897년 말 독립문 준공 때는 사설을 통해 정부가 개화 의지를 보인 사업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독립신문 주필 서재필 박사가 독립문을 지었다는 것은 독립신문과 혼동하여 생긴 잘못된 지식이다. 1897년 10월에 출범한 대한제국은 황성 만들기를 통해 근대국가 만들기와 산업근대화의 의지를 다졌다. 서울의 변모는 곧 황제의 개혁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하지만 1904년 2월,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그 군사력을 배경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하나씩 강제로 빼앗았다. 1907년 7월에는 저항하는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4개조'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일본은 고종 황제의 동태를 살피던 끝에 보호조약 추인을 요구했다.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일본 정부 수뇌부가 은밀한 방법으로 그를 독살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국민들이 3월1일 경운궁 대한문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도시개조사업으로 생긴 탑골공원에서는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그리고 광화문 앞(현재 교보빌딩 앞)의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 기념비전은 애국신민들의 또 다른 집결지 구실을 했다.

1919년 9월 상해 임시정부가 출범할 때,헌법 준비위원들은 새 나라의 국호로 '조선공화국'을 준비했다. 그런데 대의원 회의에서 신석우씨가 다음과 같이 긴급 제안을 했다. "6개월 전 대한문 앞에서 시작된 만세시위 운동의 힘으로 새 나라를 세우고 있는데,그 만세 함성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의 표시이자 비명을 애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 세울 나라의 이름은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민국이란 뜻으로 '대한민국'으로 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었다. 이 긴급 동의가 박수 속에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져 대한민국이 탄생했던 것이다. 한말의 역사를 버리고 싶은 치욕의 역사로 여기는 현대 한국인의 역사 인식은 그 뒤 일제가 문화정치란 미명 아래 교묘하게 보급한 식민주의 역사 인식의 소산일 따름이다.

이쯤 되면 시청 앞 광장의 이름이 3 · 1광장으로 바뀌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현 서울시청 건물로 쓰고 있는 경성부청이 지어진 것은 방사상 도로 체계로 생긴 넓은 터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한 것이었다. 경성부청의 고압적 건물의 잔재를 말끔히 없애고 서울광장을 3 · 1광장으로 바꾸지 않는다면,근현대사에 대한 우리의 역사의식의 방황은 멈추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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