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명원(圓明園)에 두 강도가 침입해 한 자는 약탈을 하고 또 한 자는 불을 질렀다. 역사의 심판은 이들을 영국과 프랑스라고 부를 것이다. " (빅토르 위고, 항의서한)

1860년 8월 청(淸) 함풍제가 만리장성을 넘어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도망가 텅빈 베이징을 영불연합군 2만이 점령했다. 그들은 이궁 원명원을 약탈한 다음 대포를 쏴대고 불을 질렀다. 넓은 지역에 빼곡히 들어찬 전각은 이틀을 태워도 다 태우지 못했다.



검은 연기가 해를 가려 대낮인데도 일식 때처럼 어두컴컴했다. 만국공법이 정한 외교 문호를 연다는 명분 아래 영국이 기획한 제2차 아편전쟁은 이렇게 야만의 속성을 한껏 드러낸 약탈극으로 마감됐다.

원명원은 원래 강희제가 제4황자 윤진(훗날 옹정제)에게 하사한 별장이었다. 옹정제는 매년 정월이면 시무식을 겸해 이곳에 머물렀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자금성과 달리 이곳은 숲과 호수가 잘 어울려서 쾌적했다. 이것이 관례가 되고 자금성에 있던 기능들이 하나둘씩 옮겨오면서 원명원은 이궁이지만 어엿한 정궁의 역할을 하게 됐다. 이후 건륭 · 가경 · 도광 연간에 걸친 150년 동안 황제들은 원명원에 제각각 건물을 짓고 골동서화와 보물을 열심히 채웠다.

원명원을 가장 사랑하고 아낀 것은 건륭제였다. 그는 퇴위 후 거처를 이곳으로 정하고 장춘원(長春園)이란 별도의 정원을 건설했다. 강남의 내로라하는 정원을 베낀 것은 물론이고, 저잣거리와 전원풍경을 매매가(買賣街)와 북원산촌(北遠山村)이란 이름으로 재현해 놓고 천자의 백성 사랑을 일깨웠다. 건륭제의 최대 치적으로 꼽는 사고전서(四庫全書)도 10년 만에 완성되자 7부 중 한 부를 이곳 문원각(文源閣)에 소장했다.

건륭제의 건축 취미는 유별났다. 그는 서양 선교사를 동원해 베르사유궁정을 모방한 건물들을 지었다. 이른바 서양루(西洋樓)라는 것인데, 예수회신부 카스틸리오네(중국명 郎世寧)가 설계 · 감독했다.

"바로크식 대리석주(柱)로 된 누각 위에 중국 전통 전각을 올리고 오색 유리기와를 얹었는데 보기에 웅장하고 매우 독창적이었다. "(예수회신부 중국서간집)

서양루는 중국 최초의 인공 분수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브노아 신부가 고안한 분수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해안당(海晏堂)의 시계 분수였다고 한다.

"중국 전통에서 시간과 방위를 상징하는 12마리의 동물상이 차례로 입에서 물을 뿜으면서 매시 시간을 알렸다. "

원명원의 약탈과 파괴는 영국 전권대사 제임스 엘긴이 명령했고, 직후에 체결된 베이징조약도 그가 대표서명했다. 훗날 인도 총독까지 된 인물인데, 그가 작성한 조약 문구에는 이런 조항도 있었다.

'외국인의 멸칭(蔑稱)인 '오랑캐 이(夷)'자를 앞으로는 사용을 금지한다. '

원명원의 골동서화와 유물 일부는 영국과 프랑스 박물관들에 보관되고 대부분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최근 해안당 분수의 십이지신상 중 두개가 국제경매 물건으로 나와 또 한번 중국인의 자존심이 상처받는 일이 생겼다. 청동제 동물 두상 12개 가운데 5개는 최근 중국 기업가가 사들여 회수했지만, 쥐와 토끼 2개는 작년에 타계한 세계적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소장하고 있다가 이번 경매에 나왔다. 용과 뱀 등 5개는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중국 정부는 약탈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프랑스는 거부했고, 결국 익명의 컬렉터가 1400만유로(우리 돈 270억원)씩을 주고 사갔다.

파리 국립도서관에는 원명원 보물인 4세기 때 화가 고개지(顧愷之)의 화첩 '여사잠도(女史箴圖)'와 함께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우리 조선왕실의궤도 있다. 1990년대 고속철 도입을 전후해 반환 분위기가 무르익었는데, 막상 도입이 결정되자 없던 일이 됐다. 그때 미테랑 대통령이 둘러댄 반환 불가 이유가 그럴 듯했다. "우리 큐레이터가 그 보물을 너무나 사랑해서 떠나보낼 수 없다고 한다. "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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