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가난한 사람 섬기며 살았던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점이 후회스럽다.



좀 더 몸을 낮추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었어야 했는데…



나는 특히 나환우를 비롯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빚진 게 많은 사람이다.



남들보다 그들에 대한 사랑을 더 많이 얘기했음에도 실상 그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더 자주 껴안아주지 못했다.



이승의 삶을 마감하고 하느님 앞에 서는 날,가장 호되게 꾸지람을 들을 죄가 아닐까 싶다(2007년 5월 김수환 추기경,평화방송과의 인터뷰 중에서)."

1969년 3월28일,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된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 16일 87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생전에 가난한 이들의 벗이자 평화의 전도자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김 추기경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했다.



그는 종교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독재정치에 맞서 민주화를 지켜내는 등 우리나라 현대사의 중재자로서도 평가받고 있다.

⊙ 김수환 추기경의 생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1922년 5월8일 대구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옹기장수인 아버지를 여의고 포목행상으로 살림을 꾸리는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김 추기경은 어머니의 뜻을 따라 13세가 되던 해 그의 형(김동한 신부)처럼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들어가 30살에 사제가 된다.



김 추기경의 할아버지 김보현 요한은 조선 후기였던 1868년 무진박해 때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다.



그 당시는 천주교를 믿다 붙잡혀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박해를 피해 산곡으로 숨어든 신자들은 생계를 위해 숯가마를 만들어 숯을 굽거나 옹기를 구워 행상을 하면서도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지켰다.



김 추기경의 부친이 옹기장수였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김 추기경은 이 순교자 집안에서 대를 이어온 독실한 신앙심과 가난 속에서 자라났다.

안동과 김천에서 3년간의 본당신부를 지낸 김 추기경은 독일 유학길에 올라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우며 인간관과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 때의 체험은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줬고 훗날 주교와 추기경직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귀국 후 가톨릭시보사 사장과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제12대 서울대교구장직을 거쳐 이듬해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에 이름이 오른다.



당시 김 추기경의 나이는 47세로 전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추기경은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출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다.



그만큼 한국천주교의 위상이 커졌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 우리나라 민주화의 표상

김 추기경은 내세의 복락과 영혼의 구제만 주장하는 좁은 의미의 종교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권 침해 등 우리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특히 근대화 과정에서 파생된 구조적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 정의가 지켜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일생의 힘을 쏟았다.

김 추기경은 1968년 2월9일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사회적 발언을 한다.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총재 주교였던 그는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 직물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 발표 이후 정부가 사태 수습에 나서 6일 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지어졌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편에 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었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나 1978년 동일방직노조 사건이 터졌을 때에도 추기경은 시국담화문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하는 일에 앞장섰다.



민주화의 진통을 겪었던 1970,80년대가 지나는 동안 김 추기경은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이자 보루였다.



1987년 6 · 10 민주항쟁 당시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수녀들이 있을 것이며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며 성당 내부로 피신해 있는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에 정면으로 맞선 이야기는 김 추기경의 유명한 일화로 손꼽힌다.

⊙ 스스로 가난했던 삶

김 추기경의 관심은 장애우, 나환우, 철거민, 도시빈민, 탈북주민, 외국인 노동자, 미혼모, 성매매 여성, 재소자 등 다양한 소외 계층으로까지 확산됐다.



그는 다양한 인권운동과 봉사를 실천함으로써 국민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선종 직후 자신의 각막을 두 명의 환자에게 기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장기기증자와 기부자가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김 추기경은 마지막까지 우리 사회에 '기적'을 낳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추기경이 남긴 재산이 900여만원에 불과하고 그것조차 신자들에게 주었던 선물비용을 갚고 나면 오히려 모자랄 지경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그의 무소유의 삶은 물질에 찌들어 사는 한국인들에게 놀라운 충격조차 주고 있다.



김 추기경은 깊은 종교심에서 나오는 행동과 세속적인 정치운동을 엄격하게 구분했고 또한 바로 그것 때문에 세상이 큰 혼란에 빠졌을 때는 그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가 더욱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심금을 울렸다.



작은 정치를 초월한 큰 정치이기도 했던 셈이다.

장은솔 한경경제교육연구소 인턴(한국외대 4년) energizer33@naver.com



추기경이란 : 추기경은 교황의 최측근에서 교황에게 협력하고 조언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가톨릭 교회의 최고위 직책으로,그 복장이 붉은색인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황의주교'라고 불리기도 했다.



추기경을 뜻하는 라틴어 Cardinalis는 라틴어 cardo(문의 축)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교회의 중추 역할을 하는 직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추기경 제도는 로마 근교에서 사목하던 주교와 신부와 부제들이 지근 거리에서 교황을 보필하고 조언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는 전세계 교회에서 추기경을 선발하고 있으며 교회 전통에 따라 품급과 명의가 주어진다.



추기경은 '예하'라는 존칭과 함께 자신의 교구를 떠나서도 전세계 어디에서나 신자들의 영신적 문제를 돌볼 특권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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